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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리뷰]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자취방 가는 골목길 초입, 편의점이 있었다. 자정이 넘어가면 밤을 잊은 사람들로 문전성시.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스낵코너, 레토르트식품 보관대를 지나 식음료 진열대를 찍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과자, 맥주는 장바구니 단골품목. 가방이 두둑해지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래서일까. 집에 오면 싱크대 위에 그대로 둔 채 잠들기 일쑤. 하지만 다음날도 구매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냉장고엔 차츰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로 가득 찼다. 그게, 정서적 허기를 채우려는 행동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혼자’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동시에 ‘혼자’ 있는 것이 몹시도 싫었던 스물다섯의 겨울. 밤새도록 휴대폰을 붙잡고 떠들어야 잠들 수 있었던 그때는 사랑을 하면서도 외로운 시절이었다. 더운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추운 계절감과 함께 새삼 잊었던 그때가 떠오른 건 최근 홍희정 작가의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를 읽은 까닭이다. 제목처럼 당차고 재기발랄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처음의 예상은 비록 빗나갔으나 대신 나는 이제 막 외로움에 맞설 용기가 생긴 한 여자를 만났다. 외로워지더라도 끝까지 사랑을 해보려는 ‘이레’에게서 어쩌면 나의 과거를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의 주인공은 스물여섯 동갑내기 ‘이레’와 ‘율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심리와 감정을 알아챌 만큼 아주 오래된 이성친구다. 계속된 취업실패와 탈락으로 황폐해진 이레의 마음을 율이가 달랜다면,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어렸을 적의 일로 성인이 되어서도 한없이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율이의 불안하고 예민한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레다. 둘은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지그시 눌러줄 줄 아는 소울메이트인 셈이다.

 

그러나 실은 동상이몽과 같다. 사실 이레는 오래전부터 율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율이에 대한 마음을, 사랑이란 그 감정을 혼자만의 방에 꼭꼭 숨겨놓았을 뿐이다. 이레는 율이를 좋아하지만 거절당할까 두려워 혹은 사랑이 식어버려 그가 떠나고 홀로 남게 될지 모를 먼 미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나름의 안전한 절충안을 택한 것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율의 곁을 지키는 것 말이다. 이레는 그렇게 수많은 여자들이 율이 곁에 머물다 떠나갔다를 반복했던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이 곁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레와 율이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레는 암에 걸린 할머니에게 맛있는 것이라도 사드리기 위해 ‘들어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레의 일은 정해진 시간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적당한 주의와 관심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매일 똑같은 구덩이 이야기가 반복됐고, 가출해버린 자식을 걱정하는 고객의 한숨과 이따금씩 흐느낌을 들었다. 일찍이 이레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그날 이후 ‘모든 것은 결국 떠나고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감정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고 말을 삼키고 절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들어주는’ 일이 계속될수록 자꾸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율이도 아르바이트를 한다. 율이를 시골에 떨어뜨려놓으면서도 지키려고 했던 가정의 생계원 ‘개미슈퍼’가 없어지는 원인이 될지 모를 대형마트에서. 그것도 대형마트 입점반대 점거농성 중인 엄마가 있는 그곳에서 말이다. 물론 율이에게는 두 가지가 상존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엄마를 사랑하고, 그래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만큼 엄마로부터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외로움과 결핍된 감정이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율이는 새로운 여자친구도 사귀면서 꽤 평화롭고 안정된 아르바이트 생활을 한다. 적어도 농성 중인 엄마와 정면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러나 율이와 달리 이레는 나날이 감정제어가 어려워진다. 지금까지 율이에게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율이의 연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자 참을 수 없는 질투와 시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라고, ‘집을 떠나고, 말을 배우고, 꿈을 꾸고, 목소릴 듣고 싶어하고, 합격을 하고, 울기도 하고, 고백도 해보고, 술도 마시고, 대화도 하고, 외로워하는 게 청춘’이라는 할머니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이레는 날마다 구덩이 얘기만 늘어놓았던 고객이 학회장에서 만난 여성에게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침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심한 것 같다. 자신도 그래야겠다고.

 

대형마트 앞에서 농성중인 엄마와 마주쳤던 율이가 사라지고 며칠이 지난 뒤, 이레는 율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율이에게로 간다. 할머니가 누차 말해온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말이다. 

 

나는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를 외로움과 맞서는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리고 소극적이고 감추기에 능했었던 이레가 적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군가 사랑할수록 외로움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인물 칸트의 말처럼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율이의 마음도, 율이 어머니의 마음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몸으로 오 남매를 키워낸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슈퍼를 정리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율이도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편할 리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율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우울한 목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누르곤 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3세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동아리 방의 낡고 더러운 소파에 기대앉아 장난처럼 시작한 그 행동은 어느새 둘만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쓰다듬듯, 감싸앉듯 가만가만 손을 가져가 상대를 보듬는 행위. 서로에게 분명한 충고나 조언을 직구로 던져야 할 때조차도 아둔한 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율이의 목뼈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율이는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p16)

  • 늙은이들은 암도 천천히 자란단다. 그러니까 암하고 사이좋게 같이 잘 살면 되는 거야. (p24)

  • 율이 때문에 애가 타던 나는 그때 속으로 오만한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새파랗게 젊을 때 다 소모해버리고 싶다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런 건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노년이란 내면의 피부가 아주 두꺼워서 무슨 일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초연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 같은 건 젊은 시절에 모조리 다 겪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혈기왕성한 섹스를 젊은 시절 실컷해버리고 몸속이 텅 빈,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되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가 내 생각을 알았다면 철모르는 소리라고 틀림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p26)     

  • 단지 들어주는 일을 했을 뿐인데 통화를 마치고 나니 묘한 흥분으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연극이나 영화가 끝난 뒤 무대의 불이 일제히 켜졌을 때처럼 의식의 형광등이 파밧, 소리를 내며 빛을 밝혔다. 베란다 창문을 열자 매미 울음소리가 귀를 후려쳤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이 벌게진 채 박자를 맞춰 잇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저렇게 진종일 몸통 전체를 진동하며 울어댄다면 어떤 생물이건 금세 죽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운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서로를 껴안을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p97)

  • 골목 안으로 좀더 깊숙이 들어서자 열린 대문 안쪽에서 들리는 생활의 소리들이 간혹 들려왔다.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 장독대 여는 소리, 마당에 비질을 하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친숙하게 느껴졌다. 여유롭고 아늑했다. 나는 예전부터 누군가 일하는 소리를 듣는걸 좋아했다. 할머니가 도마에 칼질을 하거나 싱크대 서랍을 열고 닫을 때 나는 소리, 손빨래를 하느라 빨래를 대야의 물에 담갔다 꺼내는 소리와 힘주어 가스레인지를 켜는 소리를 들을 때면 누군가 내 등을 토닥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작고 시시콜콜한 소리를 통해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힘들고 불안할 때마다 그것들이 나를 위로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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