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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리뷰]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저자
정지향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7-0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나는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차분하고 조밀한 언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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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민박집을 운영했던 대리님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여행카페에 인기 민박집으로 회자될 만큼 운영을 잘했고, 수익도 짭짤했다면서 부모님이 돌아오라기에 한국에 오긴 했지만 곧 다시 갈 계획이랬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년 추석 연휴에는 에티오피아 항공이 프로모션으로 싸게 판 항공권으로 아프리카도 다녀왔다. 출국 당일까지도 같이 야근을 했던 나는 질릴 정도로 많은 얼룩말을 봐서 나중엔 텐트 옆을 지나다니는 치타와 사자, 기린을 곁에 두고도 잠을 잤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자체를 좀체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내가 그녀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행’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 이후로는 대리님도, 나도 ‘떠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버릇처럼 달고 살았으나 그 말을 진짜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믿게 됐다. 그녀가 한국에 오는 카우치 서퍼들을 위해 남대문 근처에 옥탑방을 얻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부터 말이다.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말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녀는 다음 달 프라하로 떠난다. 나는 그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사람은 행동에 옮기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 둘로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를 읽는 내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데는 민영처럼 카우치 서퍼인 대리님과 주인공 나처럼 작가가 되려고 고군분투하거나 이미 작가인 친구와 선배가 있었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감의 폭이 컸던 것은 나 또한 주인공들처럼 불확실한 20대라는 터널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거다.


캠퍼스의 서울 이전과 방학으로 휑해진 지방의 자취방을 ‘고아의 도시’라 부르면서 예정에 없던 동거를 시작하게 된 세 명의 20대. 이들에게는 ‘고아’가 되기까지 각자의 사연이 있다. 민영처럼 입양이 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를 알 수 없거나 나와 요조처럼 가정사로 인해 혹은 본인의 의지 때문에 자발적으로 부모를 저버리게 된 것. 자신의 역사이자 뿌리이기도 한 가족 대신 셋만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의 삶에 대한 적당한 관심은 혈육을 대체하는 공동체로서의 유대와 결속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혈육이 아니기에 그 관심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나, 요조 그리고 민영, 이 셋의 일상은 분주하긴 하나, 제목처럼 어딘가 한곳에 닿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한심한’ 20대로 치부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일류 경영대를 졸업하고도 음악이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예술대학 늦깎이 신입생이 된 요조와 글을 쓰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상 글쓰기에만 매진할 수 없어 밤낮이 바뀐 채 알바를 하는 나, 그리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민영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당사자는 나날이 힘들기만 하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제3자가 보기에 그들의 삶에는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없다고 평할지 모른다.


그런데 목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보편타당한 20대의 삶이 아닐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게 되는 꿈과 목표는 자라는 동안 더욱 구체화될 수도 있겠지만 바뀔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몰두와 몰입이 더 넓어져야 할 세계관과 시야를 가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국영수를 잘해 명문대에 진학하고,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만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린 지 오래인 이 사회에서,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삶은 배척당하거나 멸시되는 것이 풍토인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꿈만 좇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의 삶은 표류할 수밖에 없고, 또 표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고아의 도시’에서 끝까지 남아 있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기에. 우리의 일상이 늘 드라마틱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듯,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희미해 보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도리어 이러한 불확실성에서도 끝까지 꿈과 끈, 개인적 바람을 잊지 않는 셋의 행동에서 동시대의 20대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얻지 않을까.


인생의 모든 성공을 20대에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20대의 끝자락에 와서도 바라왔던 성공의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20대를 지나고 앞자리가 바뀌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보니 20대에 꿈꿔왔던 성공이 온전히 나의 마음속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경쟁하면서 투영된 것임을 알게 됐다. 또, ‘체력과 정신력이 행복하게 만나는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라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는 것을 여전히 막연하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이 깨닫게 됐다. 그러기 위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는 비판과 가벼운 에피소드식 나열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작가가 바로 20대, 그 나이를 살고 있어서다. 동시대 또래의 현실을 이 정도로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에 공감할 줄 아는 작가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선 또한 깊어지지 않을까. 적어도 누군가를 위해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니.


“나는 어리고 나는 뭘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고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만 한 가지씩 비밀을 알게 된다”고 말한 작가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나는 뭘 모른다는 이 스물넷 신인작가가 그럼에도, 분명한 무언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용히 다음 작품을 기다리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p41

우리가 하루종일 붙어지내던 지난 겨울방학에 이곳을 ‘고아의 도시’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요조였어.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나와는 상황이 달랐지. 요조의 말대로 그는 ‘자발적 고아’였으니까. 부모님과 연락을 하지 않을 뿐, 그는 여동생을 통해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눈치였어. 우리가 그때 그런 식으로 만들었던 둘만의 언어는 이제 더위에 다 녹고 없었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자 온통 깜깜한 내 동굴이 완성되었지. 나는 내뱉은 축축한 숨을 다시 들이쉬면서 눈을 감았어. 민영은 그 도시의 어느 카페에서 와이파이를 빌려 메시지를 보냈을 테지.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라서 배낭여행자들에겐 카오스로 불린다는 그 도시를 상상했어.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냄새가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와, 어딘가 높은 음으로 삐죽거리는 더운 나라의 말투,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도로를 빽빽하게 메운 삼륜차와 택시들의 소음이 순서대로 떠올랐지. 그것들이 내 잠 속으로 따라왔어.


p51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온 한국이 내가 ‘카우치’를 찾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거. 결국엔 여행 때 만났던 친구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미국인을 소개시켜줘서 걔네 방에서 잤지만 말이야. 거기였는데 무지무지 작은 방이었지.


p53

-나는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민영은 내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박또박 말했어. 그애는 진심을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사용할 줄 알았지. 그럴 때면 의심이 많은 나 역시도 그애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어. 동갑내기 민영을 세 살 언니로 만들어서 소설을 쓴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p54

사 년이나 여행을 다닌 민영에게는 헤어지는 게 아주 익숙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지. 수없이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냈을 테니까. 나는 담담하려고 애썼지.


나는 한국에 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오빠가 있는 D시에 가봐야 할지, 아니면 학교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됐어. 비행기 티켓을 찢어버리고 민영처럼 어디로든 떠날 자신도 없었어. 그런 복잡한 마음들 때문에 나는 그애에게 아쉬운 마음을 완전히 전할 수가 없었지.


p82

-정착하려고?


요조가 물었어.


- 그 단어는 좀 거창하게 들린다. 그냥 이제 여행 다니는 게 좀 지겨워졌어.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어딘가에 익숙해진 다음 다시 떠나는 게. 평생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다시 한동안 정적이 흘렀어. 나는 왜 민영이 한국에서 지내보겠다고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나쁜 파장을 일으키는 건지 알기 힘들었지. 그 주제넘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곰곰이 생각했어.


p85
-그래. 민영. 돈을 벌어버려. 그리고 소파를 사서 카우치 서퍼들에게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자.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소파를 살 거야. 초록색으로.


p92

제대로 살고 있나. 제대로 산다는 건 뭘까. 아르바이트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글쓰기 같은 건 하루라도 일찍 때려치우고 토익학원에라도 다녀야 하는 것인가. 일 년이라도 어릴 때 재수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일단 토익과 대학생 모두가 갖고 있다는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시험부터 시작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살아서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오빠 눈치를 보지 말고 아빠의 손을 잡았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초등학교 시절 논술학원 대신 오빠와 함께 단과학원에 다녔다면 책 같은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거고, 그럼 엄마를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또 뭔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아예 다시 태어나야 하나?


내가 그 얘기를 풀어놓았을 때 요조는 이렇게 답했어.


-너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야. 우리는 애초에 그래.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알았으면 우린 그 사람만 계속 쫓아다니다가 결국엔 살인이라도 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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