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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청천동입니다."


"평창동입니다."
어렸을 적, 즐겨보던 TV 드라마의 주 배경은 늘 '평창동'이었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평창동'이 '성북동'으로 바뀌곤 했다. '성북동'이 또 다시 'OO동'으로 바뀌었던 적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받자마자 단박에 사는 곳부터 말하는 '무슨무슨동'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내 키를 두 번이나 더해도 총길이를 재기엔 모자랄 만큼 높은 벽 너머의 세상에서는 사는 곳부터 말하는 일종의 룰이 있는 듯했다. 나는 반짝이는 금테를 두른 수화기를 들어 자신의 지역을 말하는 그 장면이 재밌기도 하고 마음에도 들어, 어쩌다 집으로 전화가 오는 날이면 엄마보다, 아빠보다도 먼저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네, 청천동입니다."를 당당하게 외치곤 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면서도 침착하게 말이다.

그런 사소한 장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은 머리가 큰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브라운관의 '평창동', '성북동'이 어떠한 상징성을 가지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전화를 받을 때 "네, 청천동입니다."를 말하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내가 "청천동"이라고 말할 때마다 수화기의 전선과 회로 그 너머에서 계신 할머니가 "뭐?" 하고 되물으셨던 이유며, 큰어머니가 깔깔 웃으셨던 이유를 깨닫게 됐다. 곁에서 수화기를 건네받길 기다리던 엄마가 "이제 그만 따라해"라고 말하며 창피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까닭도 이해하게 됐다. 우리집은 "청천동입니다."보다는 "여보세요."가 훨씬 자연스럽고 어울렸다.

청천동은 내 거주지이면서 하나의 고유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태어나기만 했을 뿐 기억할 수 있는 삶의 시작부터 줄곧 나는 청천동에서 살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다 크고 나자, 나는 '청천동'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베란다에서 한강이 바로 보이는 곳에 사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고, 서울을 베이스캠프 삼아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선배의 그림자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미국에서, 영국에서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서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그러다 신문기사에서 전국 최저 학력으로 '인천'이 꼽혔다는 것을 볼 때면 괜히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통계의 오류라며 부정하고 믿지 않았던 치기 어린 날들도 분명 있었다.

모두 다 쓸데없고 소모적인 것들인데도 그런 사소한 것에 이상하리만치 목숨을 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괜한 '자격지심'이었다. 나는 내 나름의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해왔고, 열정적으로 살아왔는데 말이다. 성과가 곧 나리라 예상했던 시점이 훨씬 지나서도 결과물을 얻지 못하고, 나보다 뒤쳐져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추월해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자 나는 점점 '만족'이라는 단어 자체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친구가 아무리 꽃이 피는 시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 때분, 또 다시 침잠했다. 그러나 모든 건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믿고, 응원하고, 격려할 것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자'던 소설가 박민규의 말처럼. 어디에서 무엇이 되든, 새싹 같은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쉼 없이 반짝이도록. 어젯밤에는 방 천장에 다시 야광별 스티커를 달았다.

2012년, 마음 속에 품고만 왔던 생각들을 어떻게든 글로 담아내리라는 작은 결심. 청천동에서 지금 이순간부터, 솔직하고 담담하게 시작할 것이다. 가족에게 따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내가 되고 싶다. 말하자면 지금 이 글은 스스로 용기(勇氣)를 주기 위한 글이다. 오늘의 마음과 다짐을 여기에 기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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