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골목길 찬가

꿈꾸는 제제 2014. 5. 29. 02:38

 

 

낯선 곳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책방을 찾는 일인데, 퀴퀴한 책방에서 축축하면서도 건조한 듯한 책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헌책방일수록 더하다. 그리고 겉표지만 보고 책을 잡아든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되어있지만, 이 책을 거쳐 간 사람을 추측해볼 수 있다. 헌책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흔척이 담겨 있다.

 

4년전쯤, 나는 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살펴보던 중, 주인아저씨가 회색의 거친 종이로 감싸진 책을 들고와서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예요."라며 추천해 주었다. 사랑타령을 하는 여자로 보였던 걸까? 내게 썩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지만, 한지 느낌이 나는 회색 표지와 손으로 직접 쓴 책 제목까지 너무 멋진 디자인의 책이라 선뜻 받아 책을 펼쳤다. 그 속에는 누군가에게 선물로 줬던 흔적의 메모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줬던 책이었을까? 그곳에 있을 책은 아닌 것 같아 당장 구입했다. 그런 식으로 집으로 데리고 온 책은 산더미가 되었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듣고 있는 묘한 기분이 든다. 요즘은 예전처럼 책을 많이 보지 않고, 선물로 주는 경우도 드물어 굉장히 아쉽다. 그렇게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나 역시 버려지지 않는 책, 혹은 버려졌지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보게될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AROUND no.12

편집장 김이경

 

 

어라운드 매거진 편집장의 'editor's letter'를 읽으면서 나는 내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돌이켜보니 나는 '골목길'을 꽤 공들여 보았던 것 같다.

낯선 여행을 떠나면 나는 항상 집착이라 할 만큼 '골목길' 사진을 찍곤 했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복잡해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길이 너무도 좁아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어깨가 맞닿기도 한다.

 

 

  

 

 

낯선 타국에서 만나는 골목길에서는 행여 소매치기라도 만나지 않을까 늘 마음을 졸여야 하고

더러 오물과 쓰레기 더미, 그 오래되고 퀘퀘묵은 악취를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좋았다.

 

나는

비좁은 길을 경쾌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활기를 느꼈고,

새벽녘 취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걸음을 걷는 사람에게서 하루의 고단함을 보았다.

때로는 조용하고, 때로는 시끄러운,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아있었다.



 

물론, 나 또한 그 사람이기도 했다.

 

대학시절, 초록색 담벼락이 돋보였던 자취집은 골목길을 끝까지 지나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 골목길에 참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고, 또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았다.

끝없는 탈락으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그 골목에서 홀로 달랬고

두눈이 시뻘개질 때까지 목놓아 울기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은밀하게 그 골목에서 속삭이며 마음을 나누기도 했고

그래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찬 가슴으로 골목길을 누비기도 했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의 떨림이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

남의 집 대문 앞에쪼그려 앉아 남자친구와 시끄럽게 떠들다가 집주인에게 혼이 나면서도 즐거웠던,

그 기억들이 모두 그 골목길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골목을 떠나는 순간,

마치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슬픈 마음으로 작별의 순회를 했던 기억까지도 말이다.

 

그런 소중한 골목의 기억이 있기에

나는 낯선 곳, 그 골목길 어귀에서도 그 어떤 기억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 골목길에서의 추억은 회기동, 그 시간이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은 아파트이기에, 더 이상 컴컴한 골목길을 걸으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이 보장된다는 건 정말 좋은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대신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키고, 아무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고,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확인하는 사소한 삶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떠올릴 기억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한 이유다. 물론 반성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만큼 늘 바쁘게 살아야만 했고, 그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들레르는 새로 정비된 도시에서 삶의 폐허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삶이 살고, 삶이 꿈꾸고, 삶이 고통을 견디던" 그 어둡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부 동의하는 바다. 누구에게나 기억을 담아둘 골목 몇 개쯤은 있어야 삶이 진정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어쨌든

그래서 요즘 나는

삶을 누릴 각자의 골목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