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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우연히 문학동네 계간지 여름호에 실린 김애란의 '작가의 눈'을 읽었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눈시울이 붉어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눈이 뜨겁고 마음이 뜨겁고 무언가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울컥거리는 게 넘어오는 거 같아 나는 먼발치만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용산 철거민 참사가 생각났고, 그 참사 2주기 즈음, 안타깝게 허망하게 담아낸 심보선 시인의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여전히

 

삶이, 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는 듯하다.

 

문학동네에 실렸던 김애란 작가의 글을 잊고 싶지 않아 전문을 옮겨놓는다.

덧붙여, 심보선 시인의 시 한편도 함께.

 

(문제 시, 자진삭제하겠습니다.)

 

참고로 오늘은,

밀양 송전탑 건립 반대 농성장이 철거된 날이다.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 김애란

 

질문을 받다

 

-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2012년 겨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북콘서트 자리에서 사회를 본 문학평론가가 물었다. 한 무대에 오른 해고노동자 가족과 다섯 명의 작가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보다

 

2014년 4월. 집에서 외출 준비를 하다 처음 그 배를 봤다. ‘세월’이라는 이름 말고는 딱히 인상적인 게 없는, 평범한 모양의 선박이었다. 언젠가 나도 그런 배를 타고 수행여행을 간 적이 있다. 몇 해 전 우리 부모님도 비슷한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에 다녀오셨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자료화면은 정적이었다. 불이 나거나 건물이 무너진 현장에 비하면 어딘가 좀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런 정보도 편견도 없이 텔레비전 앞에 멍하니 있다, 가족 중 누군가 “승객들 전부 구조됐다며?”라고 얘기하는 소릴 들었다. 나는 “아, 그래요?” 대꾸한 뒤 사고 현장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잘 수습된 모양이고, 모두 구조됐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당장은 ‘모두 살았다’는 사실 외에 내가 더 알아야 할 정보는 없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고, 긴 시간 밖에 있는 동안 그 일을 잊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듣다

 

368명이라고 했다가 164명이라고 했다. 며칠 뒤 또 174명이라고 하더니 얼마 안 돼 172명이라고 했다. 배가 기운 이후 일곱 번 이상 번복된 거였다. 사고 첫날, 외국 언론에서 조난자의 수온별 생존시간을 따져보는 사이 한국에서는 사망시 보험금을 계산했다. 사람들은 권력이 생명을 숫자로 다투는 방식에 분개했다. 한쪽에서는 ‘재난의 계급화’나 ‘책임의 외주화’와 같은 말이 돌았다. 기업과 정부는 세월호에 탑승한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지금도 바다 속에서는 숫자조차 되지 못한 이들이 차갑게 굳어가고 있다.

 

이름을 들었다. 학생, 실종자, 희생자, 승객이라 불릴 때와 달리, 그들의 가족이 늘 불렀던 방식으로, 분명으로, 별명으로 불리는 걸 들었다. 가족들로서는 살면서 만 번도 더 불러본 이름이었을 거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팽목항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낮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몸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희생자 가족 중 누구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그곳에서 그런 식으로 불리게 될지 몰랐을 거다. 뉴스를 본 많은 이들이 희생자 이름 위에 자기 이름을 덧댔다. 혹은 자기 자식 이름을 포개며 같이 울었다. 중학생들은 처음엔 군대에서, 그뒤엔 대학에서, 최근엔 고등학교에서 큰일이 났으니 ‘다음은 우리 차례’라 자조했다. 모두 공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인재였다. 사람들은 앞으로 그 빈칸에 누구의 이름이 들어갈지 확신하지 못하게 됐다. 아니 또 모르겠다. 그 괄호에 ‘알바’ 혹은 ‘조급함’ ‘종북’ 또는 ‘순수’라는 말을 넣은 이들은. 최근 자식의 영정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아버지는 유족에게 막말을 일삼는 지도층을 향해 우리를 ‘제발 내버려두라’ 했다. 살려달라고도 도와달라고도 안 하고 그냥 좀 가만 놔달라 했다. 이 나라 국민들의 ‘안녕’ 마지노선이 이제는 복지도, 교육도, 의료도 아닌 생존이 돼버린 것처럼. 놔달라 했다.

 

보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사후에 ‘들은’ 게 아니다. 배 안에 있는 이들과 동시간을 보낸 거다. 지난 4월 세월호가 가라앉는 걸 전 국민이 봤다.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게 아니라, 앉아서, 서서, 실시간으로 ‘봤다’. 매일매일, 천천히, 고통스럽게, ‘봤다’. 아침 뉴스로 보고, 저녁 뉴스로 보고, 인터넷 뉴스로 봤다. 그러니까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걸. 관계자들이 책임을 가르고 이득을 따지는 동안 일부 솟아 있던 선체가 완전히 잠기는 걸 ‘봤다’. 밥 먹다 보고, 자다가 보고, 일하다 보고, 퇴근하며 봤다.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그 배가 거기서 사라진다고 해도.

 

사고 사흘째. 집 앞 분식집에서 여중생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으로 세월호 뉴스를 읽는 걸 봤다. 휴대전화로 연예 기사를 클릭하고, 댓글을 달고, 게임을 하고, 재잘거려야 할 애들이 아무 말도 않고 어두운 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본 것과 같은 걸 아이들이 봤다. 배 안에서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한 걸. 다투어 생명을 지켜야 할 시간에 권리를 외치고 이익을 도모한 모습을. 그 ‘도모’를 가능하게 한 이 세계의 끔찍한 논리를. 아이들‘도’ 봤다. 어른들이 있는 데서도, 없는 데서도.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의 의미를 알았다. 아마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게 알았을 거다.

 

듣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럴듯한 말들은 주로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 ‘엄벌’이란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기다려달라’는 청보다 선명하게 들린 건 지도층의 막말과 실언이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말은 결국 유족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어버이날, 두 팔을 올려 벌서듯 자식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정부가 말한 ‘최선’과 ‘최대’의 대상은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민심을 달래는 ‘입’이길 자처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 건 권력의 ‘귀’였다. 특히 유족들의 입장에서 그랬다. 5월 8일,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에 앉아 이들이 밤새도록 요구한 게 ‘대화’였던 것만 봐도 그랬다. 이날 유족들은 자신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우리가 원하는 건 사과라고, 우리 마음을 좀 읽어달라는 것뿐이라며 영정을 안고 울었다. 이들을 막아선, 아마도 세월호 속 학생들보다 네다섯 살 많을, 고개 숙인 경찰의 팔뚝을 잡고 울었다. 하지만 만 하루도 지나도록 이들이 원했던 ‘대화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개방상태였다. 얼마 전 ‘미개(未開)’라는 말이 문제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 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다

 

4월 말, 안산의 ‘세월호 희생자 임시 합동분향소’에 다녀왔다. 시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단원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올림픽기념관으로 향하는데, 전봇대에 붙은 ‘브라보 안산, 세계 속의 안산, 행복한 사람들’이란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다. 조문객이 줄을 선 고잔초등학교 본관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됨됨이가 바른 어린이’란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관대하고 무심하게 지나쳤을 건전한 말들이었다. 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4월 16일 이후 어떤 이에게는 ‘바다’와 ‘여행’이, ‘나라’와 ‘의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할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듯하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이 이제 우리의 시각을 대신할 거다. 세월호 참사는 상(狀)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目) 자체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지금으로서는 감도 오지 않는다.

 

듣다

 

2012년 겨울, 북콘서트 자리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씨 가족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그 가족의 얼굴을 실제로 본 이들은 일순 숙연해졌다. 뭐라 잘 설명할 순 없어도 그동안 버텨오신 날들의 이력이 두 분 얼굴에 고스란히 단겨 있어서였다. 가장이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견디며 보낸 몇 년과 아내가 생활을 꾸리며 보낸 몇 해, 엄마아빠의 투쟁 현장을 따라다니며 아이가 보낸 나날의 세목은 다른 듯했다. 하지만 세 시간 다 보통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북콘서트 2부 때 두 분은 고통을 나누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두 시간 남짓 주최측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났을 때 사회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작가들은 그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말들을 했다. 나는 좀 당황한 나머지 부끄럽고 두루뭉술한 얘기를 했다. 절망에 대해 혹은 희망에 대해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이윽고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내가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 고통이 담긴 타인의 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자영씨는 여기서 어떻게 더 노력하라는 건지,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알 수 없어 때때로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 속에는 지독한 외로움의 공기가 섞여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 금전적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 속에 철저히 혼자 버려진 느낌을 받을 때 그 시간에 잠겨본 자만 알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최근 진도 앞바다에서 나는 비슷한 장면을 봤다. 바닷물에 맨발을 담근 채 쭈그려앉아 울고 계신 분의 뒷모습에서였다. 한밤중 ‘우리 아이들을 빨리 꺼내달라’고 진도에서 청와대까지 어둡고 캄캄한 길을 십여 킬로미터나 걸어간 분들의 초조 속에도, 파도가 거세게 이는 바다를 향해 ‘힘없는 엄마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 미안하다’고 외치던 분의 울음 속에도 그런 한기가 있었다. 보통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늠할 수 없는, 상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거대한 외로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답하지 못하다

 

뜨겁지 않게 이 글을 마칠 수 있을까. 차갑지 않게 지금을 말할 수 있을까. 지난달 16일,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 안에서 한 여고생은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친구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瀉)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지난 한 달간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이 자리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난 몇 변 간, 요 며칠간 내가 가까스로 발견한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어쩌면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말이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커다란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거다. 다만 무언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

 

지난달, 임시분향소에 갔을 때, 고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두 시간 넘게 조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운동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주위에 수다를 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떠드는 건 오직 아이들 뿐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원바깥에서 그네를 타고, 모래성을 쌓으며 뭐라 외치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모든 게 마치 전생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분향소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을 따라온 몇몇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어느 청년은 모래바람 한가운데서 입을 가린 채 중간고사 교재를 읽고 있었다. 은색 스팽글이 잔뜩 달린 분홍색 손가방을 든 여자아이의 취향은 참으로 초등학생다워 어여뻤고, 엄마 품에 안긴 채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아기의 무지는 그 자체로 아기다워 생경했다. 거기 나온 이들은 다들 어렵게 시간을 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고인들에게 나름 인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싶었던 것 못지않게 나와 같은 감정, 같은 슬픔을 느끼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을 절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2011년 1월 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심보선

 

지금 그곳엔 아무것도 없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네

그곳은 텅 비었고

인적 없는 평지가 되었고

저녁 일곱 시 예배를 올릴 때에

건물 옥상에 야곱의 사다리를 희미하게 내려주던 달빛은

이제 구차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값비싼 자동차들의 광택을 돋보이게 할 뿐

오늘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되돌아볼 텐데

무너진 빌딩 한 층 한 층

깨진 유리창 한 장 한 장

부서진 타일 한 조각 한 조각

불길에 검게 그을리고 피와 살점이 묻은

학살의 증거들

학살 이후의 나날들

탄원들, 기도들, 투쟁들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이야기할 텐데

야구와 낚시에 얽힌 소싯적 추억

늙은 가슴팍을 때리던 성경 구절

수많은 인내와 소박한 꿈들

그러다 우리가 어찌어찌 용산에 흘러오게 됐는지

그러나 더 이상 어찌어찌 끌려다니지 않겠다

이번만은 싸워보겠다 이겨보겠다

그날 불현듯 하나의 영혼을 넘쳐

다른 영혼으로 흘러간 무모한 책임감에 대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겠네

우리는 그 위에 일어서서 말하겠네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

생존의 가파른 꼭대기에 매달려

쓰레기와 잿더미 사이에 흔들리며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단 말이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따져볼 텐데

불운을 함께 녹슨 철사처럼 구부러지는 운명

불행을 향해 작은 자갈처럼 굴러가는 인생

모든 것의 원인과 뿌리에 골몰할 텐데

그러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무식한 우리는 외치겠지

어쨌든 이대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선량한 우리는 호소하겠지

원치 않는 증오심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많은 영혼을

그 위로 데리고 올 텐데

언제나 배고팠던 입

먹기에 급급했던 입

그 남루한 입술들이 층층이 쌓여

높디높은 메아리의 첨탑을 일으켜 세우면

말 못 하고 외면했던 진실을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진실을

우리는 말하기 시작하리

그리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위에 선다면

오로지 희망, 희망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산 자와 죽은 자

기쁜 자와 슬픈 자

선한 자와 약한 자

모두 다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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