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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노래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겨울에 만난 우리는 여름에 헤어졌다. 헤어지기로 작정하고 만났던 그날은 우리의 기념일을 10일 정도 앞둔 날이었다. 그는 그즈음 기념일에 무얼 하면 좋을지, 선물은 무얼 할지에 빠져 있었다. 반면 나는 달랐다. 기념일이 가까워올수록 마음이 다급했다. 우리에게 그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선물, 이벤트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전에 헤어질 텐데, 뭘.

 

헤어지기로 작정한 날은 하필 날이 몹시도 맑았다. 덥고 눈부셔서 헤어지는 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일식 돈가스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밥을 먹는 내내 줄곧 딴 생각(말할 타이밍)을 하느라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귀는 동안에도 그와 헤어졌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하고, 다시 만났던 지난 날들과 그날은 분명 내 마음이 달랐다.

 

나는 선물 얘기하는 그 앞에서 단호하고, 냉정하고, 쌀쌀맞게 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내뱉을 경우에는 그것을 꼬투리 잡아 바로 헤어지자는 얘기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밥먹는 동안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심드렁한 내 태도가 그에게 이상스럽게만 보였을 테다. 그는 알았을까. 아니 느꼈을까. 우리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서로 각자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곧잘 만났던 카페에서, 나는 커피 주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했다.

 

"헤어지자."

 

마치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남자친구 앞에서 헤어지자며 맥을 끊는 개그콘서트 생활의 조건 신보라처럼. 나는 그랬다. 그 이후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어떤 정신으로 주고 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헤어지자고 말하면 붙잡던 이전의 날들처럼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보다 내가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처음 헤어졌던 날처럼 길을 걸으면서 울지 않았다. 당당하게 걸었다. 설마 콧노래를 부르지는 않았겠지, 명동의 수많은 인파에 묻혀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다.

 

혼자 카페에 남아 있던 그는 바로 자리를 떴을까, 아니면 앉아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그와 진짜로 헤어지고도 한참 뒤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주변의 많은 말들에 귀가 얇아져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 역시 그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연애에 있어 주변의 말에 휘둘리면 안된다고 깨닫게 된 것도, 더 이상 그가 생각나지 않고 나서다.

 

나는 그와 끝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애초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언젠가 헤어지겠구나, 생각했었지만, 그냥 그 시기가 조금 더 일찍, 그리고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너무 빠른 때에 찾아온 것뿐이었다며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그리고 겨울에 만난 그와 여름에 헤어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어리석게도 더운 여름에는 헤어져도 춥지 않고, 외롭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시기적으로, 헤어지기에 참 좋은 계절이라니. 그 여름은 더위를 느끼지도 못한채 어떻게든 흘러갔던 기억이다.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를 같이 듣다가 혼자 듣게 된 것뿐이었고,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계절은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번호를 지워도 그의 컬러링은 계속 생각이 났다. 나중에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를 더욱 미워했다.

 

그 컬러링은 대체 왜 해놨던 거야, 자기 취향도 아니었으면서, 대체 왜?!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다. 그 당시 나는 검정치마에 흠뻑 빠져 있었다. 락 음악을 좋아하는 그에게 검정치마의 노래를 알려준 건 바로 나였다.

 

"이 노래, 꼭 우리 둘 얘기 같아, 그치?"

 

그러더니 어느 날 그는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많이 외로워하다가..."

 

검정치마의 'antifreeze'였다. 그의 컬러링이 'antifreeze'로 바뀐 뒤부터 나는 그가 전화를 받아도, 전화를 받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다. 노랫말을 이해는 했냐며, 선생처럼 그에게 굴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실은 그보다 내 마음을 먼저 보았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그를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이라 믿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마음을 다하지 않았던 것에.

 

그는 떠났지만, 'antifreeze'는 그래도 영원히 내 곁에 남아 그와의 추억을 곱씹게 한다.

 

그가 기억에서 사라진 어느 날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인생>을 읽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일찍 나이들어버린 소년에게 가상의 소녀가 보냈던 그 노래는 바로 검정치마의 'antifreeze'였다. 이것은 그와 나의 노래인데. 그래서 서운했다기보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숨을 불어넣은 주인공이 좋아하는 노래라는 생각에 김애란 작가가 더 좋아졌다고 해야 맞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을 읽은 것도 이제 몇해 흘렀다. 다시 찾아온 여름, 6월, 나는 요새 검정치마의 'International love song'과 '젊은 우리 사랑'을 듣는다.

 

 

 

 

검정치마 Antifreeze

 

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많이 외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태양과 달이 겹치게 될 때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늘에센 비만 내렸어 뼈속까지 다 젖었어

얼마 있다가 비가 그쳤어 대신 눈이 내리더니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불 때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낯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숨이 막힐 거 같이 차가웠던 공기 속에

너의 체온이 내게 스며들어 오고 있어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 어떡해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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