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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

[바르셀로나] 오후 2시 같은 저녁 8시, 지지 않는 해




[바르셀로나] 오후 2시 같은 저녁 8시, 지지 않는 해와 같이



스페인 여행기를 본격 시작해보려고 해요. intro에서 언급했듯, 저는 바르셀로나로 들어갔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즉흥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마치 지도를 펼쳐 두고 눈을 감은채 손에 짚이는 곳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식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그래도 꼭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은 기록해두고 어떻게든 가리라 마음 먹고 갔답니다. 저의 경우 피카소와 가우디, 돈키호테, 플라멩고 정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설레고 가슴 벅차지만 막상 떠나는 순간이 오면 복잡미묘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공항까지 데려다준 동생과 아빠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미안하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가족이 먼저냐, 내가 먼저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저는 이번에도 저를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결정에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서운했으리라 짐작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 다녀오라고, 아빠는 면세점에서 간단히 무어라도 사라며 돈을 쥐어주셨어요. 


한국에서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는 저처럼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한국인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도 같은 한국인이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떨리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주었답니다. 무거운 마음까지도 날려주었어요. 하지만 두바이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부터는 조금 달랐습니다. 일단 아랍계, 유럽인들이 90퍼센트 이상이었고,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아무렇지 않진 않더라고요. 정말 혼자가 되었구나, 싶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괜히 움츠러든 탓이었을까요. 여행회화 정도야 가뿐하지, 라며 호기롭게 시작했던 마음도 막상 여권을 내밀고 심사대를 통과해야 하는 간단한 절차 앞에서 쉽게 작아져 저는 참 출발하면서부터 외롭고, 떨렸습니다.


비행기에서 자다 깨다를 수도 없이 반복했고, 먹다 잠들기도 수차례. 영화를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고, 음악을 듣다가도 골아떨어지곤 했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골고루 볼 수 있는 즐거운 기회는 물론 놓치지 않았습니다. 늑대인간, 웜바디스, 안나 카레리나, 세이프 헤이븐, 레미제라블까지 정말 영화를 두루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착륙시간이 다가올수록,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답니다. 가기 전에 소매치기한테 나도 모르는 사이 당했다는 류의 글을 너무 많이 봤던 게 영향을 많이 끼쳤던 것 같아요. 배낭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in부터 동행이 없던 것은 처음이었기에 왠지 계속 콩알만해지려는 심장을 붙잡아두어야 했답니다. 


저는 스페인에서 줄곧 한인민박집과 유스호스텔을 이용했어요. 전체 일정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바르셀로나에서 도착해서 묵을 숙소만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갔답니다. 제가 묵었던 곳은 바르셀로나 디자인공간(http://cafe.naver.com/barcelona32). 숙소를 찾기 위해 큰 고민은 하지 않았습니다. 두세군데 정도 보았고, 온라인 커뮤니티이긴 했으나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져 주저없이 이곳을 택했습니다. 만약 다시 바르셀로나에 가게 된다면 또 다시 묵고 싶을 만큼 숙소도, 숙소 사장님(언니)도 넘넘 좋습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사장 언니가 알려준대로 aerobus(스펠링이 정확한지 모르겠네요) 까탈루냐 광장까지 오는 공항버스를 탔습니다. 캐리어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은 후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저처럼 바르셀로나를 찾은, 그래서 이렇게 같은 공항버스를 탄 여행자들은 저마다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혼자 있으니 생각이 많아져 별스럽지 않은 것에도 눈이 갔고, 마음이 쓰였습니다. 30분 남짓 달려, 정말 버스는 친절하게 까탈루냐 광장에 저를 내려주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약도대로 따라가니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이곳이 한국이 아님을, 피부로 느껴지도록 증명해주었습니다. 





지나가다가 잠깐 길을 헤매, 광장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니 길을 헤맸다기보다는 그냥 발이 이끄는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수많은 테라스와 야외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뜨거운 공기, 시끄러운 대화, 웃음,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 스페인에 오긴 왔구나'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레알광장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답니다.





숙소로 가는 길,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가는 길에 스타벅스가 있었고, oreo라는 이름의 타파스 가게를 보았던 기억도 나네요. 아, 서브웨이도 있었어요. 당시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니 제게 익숙한 것부터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숙소에 도착했고, 짐을 내려놓자 긴장이 풀려 몸이 한없이 나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밖에 나가기 전에 한 두 시간 정도 잠을 잤던 것 같아요. 제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가 현지시각으로 3시 반 정도 였고, 일어나보니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던 기억입니다. 한국처럼 곧 해가 저물테니 오늘은 나가지 말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테라스로 나가보니 이게 웬걸요? 바깥은 아직도 대낮처럼 환했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시끄럽고 분주했습니다. 


제가 묵었던 디자인 공간에서 내려다본 거리예요. 이렇게 날 밝은 시간에 아무 목적 없이 사람구경을 했던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라 정말 좋았습니다. 테라스 천장부터 바닥까지 흰 커텐이 걸려있었는데, 문을 열어놓으면 바람도 곧잘 들어와 커텐이 항상 펄럭였고, 저는 그 바람과 바람에 펄럭이는 커텐의 움직임 마저도 마냥 좋았습니다. 


저는 여자 5인실에 묵기로 해서, 자다 일어나보면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때도 숙소에는 저 혼자였습니다. 소매치기나 그 어떤 난관도 맞닥드리지 않고 도착했기에 꽤 많이 안정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처음이었으니까요. 모든 것이. 


숙소 사장 언니는 테이블에서 숙소의 위치와 숙소 주변 먹거리, 상점, 명소 등을 알려주셨어요. 흰 종이에 쓱쓱- 그림을 그려 손그림 약도를 만들어주셨는데, 저는 척척- 그려내는 모습에 감탄했었고, 약도가 귀여워 언니가 그려주었던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한국으로 가져와 메모해둔 일기장과 함께 넣어두었답니다.





디자인공간에서 10m 정도만 걸으면 바로 시청 앞 광장(지우메광장)을 만나게 되는데요. 제가 밖으로 나왔던 시간에는 대학생 혹은 20대 청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텐트를 펼쳐두고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단체로 모여있기는 하지만 둥글게 앉아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세요! 체스를 하고 있는 두 남자도 분명 함께 집회를 나온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저 여기서 꽤 오래 이 광경을 지켜봤거든요. 그건 믿으셔도 된답니다. 


우리도 요즘은 집회나 시위의 방식이 많이 변화해 평화적인 모습을 띠는 것을 상당히 많이 봤기에 특별히 더욱 신기한 장면은 아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청 앞 광장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앉아 서로 토론을 하고, 그걸 경찰은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는 모습에서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가 우리보다 더 보장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네요. 물론 저야 그 이면을 모르니 이 광경만으로 내린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어떤 이유로 집회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핸드아웃 프린트물을 나눠주는 남자에게 "너희 지금 무엇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야?"라고 물어봤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영어를 못...했습니다. 저도 못하지만, 그 남자는 더욱. 영어로 물었는데 스페인어로 답을 해주어서, 더 이상의 대화는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생각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어도 대낮처럼 환한 바르셀로나에서, 그렇게 지지 않는 해와 같이 어쩌면 이들도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바라는 무언가가 반영되도록, 지지 않기 위해 시청에 모여든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지지 않는 해와 같이.





시위대를 뒤로 하고, 저는 드디어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공간 사장언니가 알려준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어요. 서브웨이보다 가격이 저렴한데, 양도 많고 맛도 좋다고 하여 왔는데......... 문제는 언어였어요. 스페인어 메뉴판을 보면서 당황한 저는 주문 받는 사람에게 영어로 추천해달라고 했으나 역시 스페인어로 알 수 없는 대답만 들어야 했던 거예요. 어떻게 주문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맛이 없지는 않아 콜라와 함께 다 먹었습니다. 혼자 첫 끼니를 해결했다는 안도감과 아직은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이렇게 인증샷도 찍었어요. (샌드위치는 없고, 저만)





밥을 다 먹고, 보께리아 시장 구경을 갔습니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를 들어 바글바글한 곳에서 행여 돈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잔뜩 겁먹고 긴장을 했던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도 살짝 드네요.




 

 



하몽, 생초콜릿, 싱싱한 해산물류, 샹그리아, 와인, 그리고 츄파춥스까지. 없는 게 없었어요. 먹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즐겁고 재밌었답니다. 츄파춥스가 스페인산이라는 것도 보께리아 시장에 온 덕분에 제대로 알게 됐고요. 저는 보께리아 시장에서 수박주스를 사먹었(다고 일기장에 적혀있)어요. 맛에 대한 평은 없는 걸로 보아 맛까지 제대로 느낄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던 것이겠죠? ㅎㅎ






싱싱한 과일들이 정말 많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어서 하나씩 전부 다 먹어보고 싶었어요. 체리는 싸서 그 자리에서 사먹긴 했지만 저렇게나 많은데 어느 정도는 먹어줘야죠. (아시잖아요, 먹방느낌- 점점 글이 산으로...) 여튼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서 이후에 또 보께리아 시장에 오겠지 싶어, 건성건성 패스하고 지나간 곳도 있었는데, 첫 방문이 마지막 방문이 될 줄은 이 때까지는 미처 몰랐답니다. 그래서, 놓치고 못 먹고 온 과일이 아직도 눈에 아른아른-



그래도 첫날 별탈없이 잘 보냈다고,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밤 10시 반 정도였을 거예요. 바르셀로나의 10시 반은 한국과 비교해본다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여름 저녁 8시 경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좀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그래서인지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고 거리를 떠도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답니다. 그 왁자지껄한 소리에 잠들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쉽게 지지 않는 곳이어서, 해가 길다는 것이 여름을 사랑하는 제게는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지지 않는 해처럼, 저도 여행 내내 한국에서 타격을 입은 무언가들로부터 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지지 않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