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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리뷰] 비행운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읽은 뒤로 나는 공항에 갈 때마다 『비행운』에 실렸던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황금연휴를 맞아 한국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든 사람들 곁에 홀로 남아 공항을 청소하던 아주머니의 삶을 그려낸 ‘하루의 축’ 때문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면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마구 물기를 털었던 나는 그 뒤로 보다 조심하게 됐다. 그러다가 자칫 입을 벌리고 속을 훤히 보일까 두려워 노란 테이프로 칭칭 감았던 오래된 내 캐리어 가방을 보면서 또 한번 소설을 떠올렸다. 해외여행갈 때 가져갈 캐리어가 없어 친구에게 빌렸지만 이래저래 들어간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후회했던 이야기 말이다. 내게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야기는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화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김애란이라 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편소설집 『비행운』에는 결핍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선배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으나 자신감이 없었던 나, 회사를 다니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마음 놓고 사기에는 다소 부족한 경제력인 20대 후반의 그녀, 운 좋게 싼 아파트를 얻었으나 그것이 불운과 같았던 신혼부부, 철거직전 아파트에 살다 단란한 가정이 무너져 버린 한 아이까지. 보이지 않는 계층 격차를 뛰어넘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깊은 늪에 빠지는 듯한 이야기는 어둡고, 그래서 답답하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았던 20대 중반까지의 나는, 세상은 만만한 것이라 생각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바라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숱한 실패와 낙방이라는 시간을 견디고 보니, 세계를 보는 나의 관점도 달라지게 됐다. 간절히 바라더라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울고, 아파했던 그 시간들로 나는 단단해질 수 있었지만. 앞모습보다 뒷모습, 강자보다 약자의 삶에 끌리는 것도 개인적 경험을 겪은 뒤 더욱 강렬해졌다. 그래서 비행운의 인물들을 보면서 더욱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이 좋으냐고 다시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냉혹한 현실과 시련이 찾아오고, 때로 찌질하고 모순된 행동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더라도 김애란 작가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겪어본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진실된 이야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울림과 따뜻한 시선이 분명 내재돼 있다. 마치 온갖 비극과 고난에도 희망은 있다고 반전을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말처럼.


『침이 고인다』를 읽었을 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비행운』을 읽었을 때 비로소 뒤늦게 회사원이 됐다. 후배와 자취방 문제로 투닥거렸던 개인적 경험을  『침이 고인다』를 읽으면서 객관화할 수 있었다면 네일아트를 받을까 말까를 두고 한참 고민했던 나는 『비행운』을 읽으면서 또 한번 삶을 반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로 받았고, 눈물이 났지만 기쁘고 행복했다. 나와 같은 소시민적 삶에 변함 없이 시선을 두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가 동시대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간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직접 마주 앉아 무거운 인생도 가볍게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 꿈을 갖고 있다.

 

*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p24, 너의 여름은 어떠니)

 

*

 

스물여덟. 이제 막 서른을 바라보는 내 몸이 알맞게 그리고 충분히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간 몇 번의 연애가, 구직이, 이사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울에 갓 도착한, 스스로의 구매력을 어색해하던 스무 살 때보다 건강하다. 내가 나를 돌보는 느낌. 소비는 조심스럽고 수줍게 진행됐다. (p211, 큐티클)

 

*

 

나는 필요에 쫓기지 않았다. 필요에 의지했다. 소비는 내가 현재 대도시의 왕성한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p213, 큐티클)

 

*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p214, 큐티클)

 

*

 

작가의 말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보았느냐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다.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짓는다.

여러 개의 문장을 길게 이어서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기어코 다 부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알 수 없어

한 번 더 불러보게 만드는 그런 이름을.

 

나는 그게 소설의 구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서른'의 한 장면은 내 가족, Y의 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낡고 오래된 캐리어를 위한 처방

노.란.테.이.프

 

마무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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