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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될 수 있을까

인형 뽑기는 못해도 살 수 있지만 헤드라인 못 뽑다가는

 

 

인형 뽑기는 못해도 살 수 있지만

헤드라인 못 뽑다가는

 

홍보대행사 면접을 한창 볼 당시만 해도 가장 자신있던 분야가 바로 시사와 토론, 그리고 글쓰기였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던 걸까요.) '기자를 준비했다'는 한 줄의 팩트가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날마다 신문을 읽었고, 이슈를 정리했고, 신문에 나오는 상식 키워드까지 외워두었으니까요. 완벽하진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시험용 논술을 작성해왔다는 점 때문에 어떤 주제를 받더라도 시간 내 완성할 수 있겠다는 자신도 있었고요.

 

실제로 첫 직장이었던 그곳은 언론사와 아주 유사하게 전형을 치뤘습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자 주제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 논술을 작성했고, 면접 전 찬반 토론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전형에 당당한 건 아니었겠지만 익숙한 전형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저는 팟캐스트 나꼼수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주제에 관해 글을 썼고 면접장에서도 꽤 확고한 주장을 펼쳤던 기억이 납니다.

 

약간...아니 심한 압박 면접을 2차례나 치르면서 막판에 유리 멘털이 붕괴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맛본 '최종합격' 통보에 무척 기뻤습니다. 남들에 비해 너무 늦은 시작이었던 만큼 간절했고, 절박했었던 터라 그저 좋았습니다. 대학시절 기업과 공공기관 등 주최 하에 무슨무슨 홍보대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했던 수많은 활동들이 홍보대행사 AE가 되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됐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뉴스를 보다

큰 페스티벌 기획도 하고, 대학생 서포터즈를 뽑아 기업을 알리는 홍보 활동도 하고...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사실 AE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잘 몰랐으니 어쩌면 그런 일을 마음껏 기획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 제가 입사하자마자 가장 많이 한 일은 뉴스를 보는 것이었죠.

 

매일 아침 클라이언트(고객사) 소식 또는 클라이언트의 경쟁사 소식을 샅샅이 검색하고 정리했습니다. 업계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홍보 일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경쟁사가 참신한 홍보 활동이나 프로모션을 할 경우, 클라이언트와의 다음 미팅에 새로운 제안을 권할 수도 있고(물론 실제로는 현실적으로 비용 집행의 어려움이 따르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신제품 출시로 트렌드를 파악할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트렌드의 패턴이 매우 짧고 빠르게 변화하는 화장품, 뷰티 시장을 공부하는 데는 매월 나오는 잡지가 아주 유용한 정보이자 스승이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뉴스 모니터링과 별개로 매월 20일부터는 새로 나오는 잡지들을 몽땅 사서 경쟁사 광고나 카피, 신제품 이름 등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다음달 홍보 아이템을 기획했죠.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지만, 그런 날들은 손에 꼽았고, 거의 식상하다는 평을 들으며 고개를 떨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예뻤다'의 주인공 김혜진(황정음 역)이 패션 잡지 어시스턴트가 되고 패션 용어들을 공부하기 위해 잡지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던 것처럼, 저도 화장품 클라이언트 홍보를 맡으면서 '안티에이징', '추출물', 'T존', 'U존' 등을 알게 됐더랍니다. 잡지는 신문보다 말랑말랑하고 참신한 기획들이 돋보여 센스 있는 헤드라인을 뽑는 데에도 아주 좋은 참고서였죠.

 

 

그때의 경험이 밑천이 되어 의류 브랜드 홍보를 맡고 있는 지금도 헤드라인을 뽑기 위해 잡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곤 합니다. 물론 잡지 뿐만 아니라 매일 반복하는 업무인 모니터링을 통해서도 헤드라인의 아이디어를 수집할 수 있답니다. 항상 깨어 있고 관심을 갖고 촉을 세우면 동종업계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타 브랜드, 타 업계 소식을 통해서 충분히 새로운 헤드라인을 끌어올 수 있으니까요.

 

헤드라인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역시 잘 읽히기 위해서. 제가 공들여 쓴 보도자료가 기자들이 받는 수백통의 메일 중 하나로 묻히지 않기 위해, 기자들의 메일 클릭률을 높이기 위해 헤드라인에 무척이나 공을 들인답니다. 날마다 스크랩해둔 참고기사를 보며 한방에 컨펌되는 헤드라인을 짓고 싶지만, 기대와 달리 저는 날마다 헤드라인 때문에 혼나는 날이 부지기수랍니다.

 

      

 

 

"보도자료 내용 갖고 내가 뭐라 하든? 제발 헤드라인이랑 리드문만 잘 뽑아봐라."

"이거 영 별로다."

"밋밋해, 다시."

"고민 안할래?"

"니 요즘 신문 안 읽나!!?"

 

제가 자주 듣는 말이며, 아무리 많이 들어도 감정이 무뎌지지 않는 말입니다. 보도자료 내용보다도 제목 뽑는데 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이상하게도 요즘엔 제목 때문에 컨펌이 안 되는 날이 많아 날마다 깨지고 있어요. 어느 날에는 정말 센스감 쩌는 편집 기자의 영혼에 빙의되어 한 방에 통과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대리 된 지도 꽤 됐는데 정말 헤드라인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사수는 제 헤드라인만 봐도 제가 신문을 읽는지 안 읽는지 아는 터라, 신문을 읽어야지 매순간 결심하지만 바쁜 오전 시간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짬이 나지 않아 많은 뉴스를 휘리릭 훑어보는 데 그치고 말고요. 결국 제게 마이너스 요인이 되리란 걸 알면서도요.

 

매일 신문 읽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던 몇 년 전처럼까진 못 돼도 적어도 제목 못 뽑는다는 소리는 그만 들을 수 있게 정말 신문 읽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인형 뽑기는 못해도 살 수 있지만 홍보 AE가 헤드라인 못 뽑다가는....먹고 사니즘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특별한 기술이 없는 저는 헤드라인 뽑기는 잘 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다시 필사라도 시작해야 할까봐요. 언제까지 홍보 AE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일하고 있는 지금은 욕 먹지 않고, 잘하고 싶으니까요. 잘 먹고 잘 살 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