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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빠에 관해서는 100번을 말해도 100번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의 테마는

아빠의 청춘

 

 

수능이 끝나고 한없이 잉여롭던 그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공부하라는 흔한 잔소리 한 번 한적 없던 아빠는

그날 꽤 진지하게 재수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아빠 입에서 나온 말이

동생과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고

엄마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도 아니어서

몹시 놀랐다.

 

재수는 그 당시 내게는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단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또한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아빠는 더 권하지 않았고

나는 그 해 12월 31일 모 대학의 합격 전화를 받고 진짜 대학생이 되었다.

 

술 마시느라 집에 안 들어오고

늦잠 자느라 수업에 못 들어가고

정작 제대로 학교에 간 날조차 자체 휴강을 하고는

아빠 회사를 찾아가 책 산다며 받아간 돈으로 영화를 보았던

수없이 속였던 많은 날들을 뒤늦게 후회했던 어느 날

 

 

 

 

 

아빠는

사실 독문과에 가고 싶었다고

 

그치만 플래카드에 불일 이름 수가 중요했던 담임 때문에 맞지 않는 법대를 선택했고

달리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사시를 준비했지만

하는 동안 재미 없었고

그러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다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시를 접고 그 길로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아빠가 재수를 권했던 그 날은

담임의 호출로 아빠가 학교를 갔던 날이었는데

만약 그때 내가 아빠 때문에 하기도 싫은 선택을 했더라면

두고두고 미안했을 뻔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아빠에게

독문과를 선택하지 그랬냐는 말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바로 취직하지 말지 그랬냐는 말

그래도 하고 싶은대로 하지 그랬냐는 말 중에서

어느 것도 결국 하지 못했다.

 

그 길로 건설사 영업맨이 된 아빠는 퇴직할 때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나와 내동생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길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빠는 퇴직할 때까지

쉬지 않고 CD를 사들였고

아주 많이 술을 마셨고

끝도 없는 오지랖으로 주변에게 퍼주고 다니셔 (심지어 부하직원에게 월급을 갖다줬던 것도 수차례)

그것들이 종종 실은 자주 엄마와의 싸움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미약하게나마

혹은 유일하게

아빠의 지나간 청춘을 보상해주는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얼마 전 퇴근 시간을 앞두고

엄마에게 급하게 카톡이 왔었다.

 

조금 더 있다 사자는 말도 안 듣고

아빠는 망가진 노트북을 내팽겨둔 채

그 길로 새 노트북을 사겠다며 서울 갔다는 것

 

그리고 분명 나한테 전화할 테니

아빠 만나면 저녁 먹고 같이 내려오라고

(실컷 아빠 욕하다가 맛난 거 사주라는 게 엄마의 결국 진심이겠지만)

 

엄마의 예상대로 아빠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우연히 합정을 지나는 길이라는 듯한 말투였으나 아주 어색했고

엄마에게 혼날까봐 같이 들어가려는 게 몹시도 티났다.

 

나는 모르는 척 아빠의 연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내가 수없이 거짓말하며 아빠에게 돈을 타 갔던 날들도

실은 알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처럼

 

  

 

 

응답하라 1988 '슈퍼맨이 돌아왔다' 편을 보고

한참이나 울컥한 마음으로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으며 아빠의 청춘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