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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될 수 있을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후배가 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이 힘들다는 것

날마다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인상파 이대리, 꼬장꼬장 이대리

변신 아닌 변신을 거듭하면서

그나마 확실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는

좋은 선배는 되지 못할 것 같다는 것,과

그 동안

내가 수없이 욕질을 해댔던 그 선배들,

술자리 안주 삼아 씹었던 그 선배들이

마냥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

그 사실 뿐이다.

 

 

 

#1

 

2016년 9월의 일이다. 입사 한 달을 막 지난 수습 후배를 데리고 강릉 출장을 갔었다. 선배 없이 가는 출장은 나 역시 처음이었고, 클라이언트와 함께 투숙하며 행사를 치러야 하는 일정이다 보니 나는 나대로 긴장을 많이 했다. 노트북과 카메라, 그 외 잡다하게 챙겨야 하는 것들 외에도 옷과 신발처럼 개인적으로 챙겨야 하는 짐들도 많았다. 물론 많은 짐보다 행사장에서 촬영하고, 멘트를 따고 보도자료를 써서 몇 차례 배포해야 하는 일정이 가장 신경 쓰였다.

 

대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선부터 본선을 거쳐 며칠 간 진행됐다. 클라이언트 담당자들은 정말 바빴다. 방송사를 케어해야 했고, 현장 행사 대행사를 컨트롤 해야 했다. 수십 명의 참가자들도 챙겨야 했고(더러 일부는 클레임을 하기도) 그 회사에서 직접 강릉까지 내려오신 임원분들도 신경 써야 했다. (심지어 '비'가 언제 올지, 얼마나 올지, 언제 그칠지 가장 많이 확인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눈치껏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 업무만큼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실수없이 하되 상황이 수시로 변하는 만큼 상황을 살피면서 요리조리 문제 없이 해결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눈치껏 알아서 하려고 할 때마다 움직일 수 없어 발이 묵였다. 숙소에서 행사장까지는 차를 타야 이동이 가능했는데 우리는 차가 없었다. 나도, 후배도 운전을 못해 이동할 때마다 이곳, 저곳 히치하듯 자리를 빌려 탔다. 강릉까지 대회 참가자인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온 후로도 나는 계속 클라이언트 팀장님(부장님), 포토그래퍼,  또 다른 블로거의 차를 얻어타고 다녔다. (한 번은 포토그래퍼 실장님도 행사장에 차를 안 가져왔다길래 블로거 차를 같이 얻어타고 숙소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이 일을 회사 상사에게 얘기하니 "니가 왜 차도 없으면서, 니 차도 아니면서, (니가 케어해야 할 사람 차를 니 맘대로 타게 하면서) 오지랖을 부리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후배에게 이동수단을 알아보라고 했다. 숙소와 행사장을 오가는 왕복 셔틀 버스나 카트 같은 게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리조트 내 안내 직원이나 셔틀 담당 직원에게 확인해보라고 말한 뒤 나는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다 말고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는 후배 뒤에 대고 소리쳤다. "모르겠으면 제일 확실히 알 것 같은 사람한테 물어봐요! 여기 책임자 같은 사람!"

 

그 마지막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후 돌아온 후배는 아무래도 셔틀 시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더니,  

곧바로 클라이언트 팀장님(행사 총 책임자)에게 걸어갔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후배는 팀장님께 셔틀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팀장님은 후배 얘기를 듣다가 나를 쳐다봤다. '지금 너네 회사 막내 나한테 물어보는 게 무슨 말이야?' 라는 눈빛으로.

 

'별 얘기 아니었다'고 말씀 드리고, 후배에게 돌아오라는 손짓을 했다. 팀장님 차 얻어타는 게 미안해서 셔틀 버스 시간 알아보라고 한 건데, 그걸 왜 그 팀장님한테 가서 물어보냐, 나는 잔소리를 했고, 후배는 덥지 않은 비 오는 여름이었는데도 땀을 흘렸다.

 

 

 

 

저녁이 되었다. 참가자들을 위한 DJ파티가 열렸다. 파티 중간쯤 본선 진출 참가자들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나는 행사 담당 대행사나 클라이언트 쪽으로부터 어떤 자료도 공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가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떨렸다. DJ파티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잘 챙겨둬야 자료를 빨리 쓸 수 있다. 그 생각 덕분에 눈앞에 맥주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예상한대로 4위부터 차례로 이름과 타수와 시간 기록이 발표됐다. 예상했지만 진행자의 말은 빨랐고, 파티장소는 시끄러웠고, 나는 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이름과 기록을 놓쳤다.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박수치는 틈틈이 사진 찍고, 적어둬야 했다. '20분 만에 9홀 완주'로 방향을 잡고 나서야 나는 조금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도 놓친 정보들은 챙겨야 했기에 후배에게 물어봤다. 물어볼 때마다 후배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려보니 후배는 너무나 즐겁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냥 편하게 놀게 놔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지만, 그때는 똥줄 탄 나와 달리 웃고 있는 후배가 괘씸해 "놀지 말고 현장에서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겨라"고 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을까.

 

 

 

 

그러나 후배 갈굼은 끝나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온 덕분인지, 때문인지, 그리하여 행사가 중단됐던 날. 그 동안 찍어둔 사진 셀렉과 보정 작업을 시작했다. 클라이언트 여자 과장, 사원, 나, 그리고 나의 후배까지 모두 다같이. 내가 추려 놓은 사진 안에서 클라이언트 담당자가 최종 선택했다. 처음으로 긴장이 풀렸던 순간이었다. 사진을 보면서 농담이 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가 반말처럼 애매하게 뒤를 흐리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귀에 거슬렸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니 반말이라니? 반말!? 상대 과장은 후배보다 12살이나 많았다. 아무리 편한 자리일지라도 반말은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그 자리를 서둘러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또 하고 말았다.

 

"OO씨, 혹시 과장이 반말해서 기분 나빠요? 과장이 나한테도 반말하는 것 봤죠.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몇 년 봤어도, 나도 과장한테 반말 안하는데....OO씨는 지금 초면이고, 반말하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나 진짜 아까 깜짝 놀랐어요. 이건 우리 회사 얼굴에도 먹칠하는 거예요."

 

본인이 반말을 했냐고, 깜짝 놀랐던 그 후배는, 그러나 그 몇 주 뒤 있었던 팬 사인회에서도 클라이언트 막내 사원에게 반말을 했고, 그 다음달에는 결국 회사를 그만 두었다.

 

 

 

 

#2

 

얼마 전 제안서를 쓸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울팀 과장님은 팀 막내에게 자사와 경쟁사 기사 분석을 맡겼었다. 후배는 과장님한테 보내기 전, 나를 불러 한번 봐달라고 확인을 부탁했다. 쉭- 보고 끝내려다가 빠진 게 너무 많아서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이런 기사들은 왜 분석 내용에서 전부 뺐어요? 이거 싹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후배는 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어차피 유가 광고 기사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후배는 그저 되물었을 뿐인데, 나는 그 말에 혼자 화가 나 그만 쏘아 붙이고 말았다.

 

"광고라뇨, 그럼 우리 팀이 날마다 보도자료 배포하고 모니터링하는 기사는 안 봐요? 그것도 유가 기사라고 생각했나요. 그렇게 생각했음 여태껏 우리가 기자 만나고 자료 배포하고, 어렵게 기획 기사 피칭하는 것 전부를 너무 생각안해본 것 같네."

 

그렇게 쏘아 붙인 게 미안했다. 화내고는 뒤돌아 후회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후배 또한 본인의 실수를 알거라 생각하기에 스스로 이해할 시간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나에게도 그렇게 혼나기만 했던 시절이, 혼나도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역시나 나는 오늘도 화를 내고 말았다. 지난주 금요일 웃고 떠들다가 오늘은 또 다시 정색하고 화내는 나를 보면서 후배는 무슨 생각을 하려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나 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는 쉽게 변하는 걸까?

 

이제 나는 후배의 마음도 물론 이해되지만

나에게 그렇게나 혼내고 화냈던 선배들의 마음을

내게 하루가 멀다하고 잔소리를 했던 전 팀장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다.

 

 

 

  

 

 

 

"주차장 나올 때 주차비 현금 좀 갖고 다니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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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 제대로 할 때까지 기자미팅 안 데리고 다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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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 그 머리 돈 주고 한거야? 그 머리 풀 때까지 기자미팅 못나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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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랑 놀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팀 선배들이랑도 좀 친해져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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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쓰는 자료 초등학교 6학년 일기 같아. 아니 일기 수준도 못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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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니가 이 자료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주제가 뭔데? 야마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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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하는 건 좋은데, 현실적인 예산을 고려하면서 제안할 줄 알아야 진짜 AE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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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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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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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좋은 선배가 되긴 틀린 것 같지만

그래도 나쁜 선배나 이상한 선배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