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그리고 할머니

 

곧 스무살, 첫 여름을 맞이할 친척 동생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10년 먼저 대학 시절을 보낸 선배로서, 나처럼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삶을 잘 설계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다. 본격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내용을 구상하다가 나는 10년 전, 그러니까 2004년 나의 스무살 첫 여름을 떠올리게 됐다.

 

누군가 인생에서 잘한 일을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스무살 첫 여름을 '길'에서 보낸 것이라고 답한다. 20박 21일, 430킬로미터 도보완주를 하는 동안 얻은 것은 그 어떤 물질적 가치와도 맞바꿀 수 없을 정도로 내게는 너무도 값진 경험이다. 동생에게 꼭 한 번 길 위에서 보내는 여름을 맞아보라고 해야지. 그러다 문득 그 20일에는 소중한 경험이 또 하나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금강산'에도 다녀왔던 기억까지도.

 

 

 

 

'한반도를 적시는 희망의 땀방울'이라는 슬로건(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아래, 국토대장정은 2박 3일 일정의 금강산 관광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희망은 당연히 통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금강산을 보면서 통일을 생각하거나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통일'보다는 '관광'이라는 데에 더 많이 끌렸다. 그래서 금강산 앞에 자리잡은 천막 텐트에서 우리는 쉴새없이 게임을 하느라 바빴다. 우리가 금강산을 눈앞에 두고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기보다는 '공공칠빵'이나 '공동묘지', '마피아와 시민'과 같은 것들이었다. 금강산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자가 더 소중했다.

 

그렇다고 '금강산'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깊이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아니었던 내게도 금강산의 절경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바위의 장엄한 모습과 굽이굽이 산능선과 사이사이의 안개구름의 조화가 신비로웠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는 사실이었다. 팔선녀가 모여 목욕을 했다는 상팔담을 내려다볼 때는 마치 선녀가 된 듯, 선인이 된 듯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되면서 나는 언젠가 꼭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금강산 관광을 시켜드리고 싶다는 작지만 큰 꿈을 품게 됐다. 금강산에 얽힌 추억이 전혀 없었던 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멈출 수 없었는데, 그곳에 실제 살았고, 그래서 수많은 시간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할머니가 다시 북녘땅을 밟게 된다면 어떠실까. 얼마나 좋으실까. 얼마나 보고싶으셨을까. 그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했다. 그래도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마음으로 꼭 금강산 관광을 보내드리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고가의 관광 패키지는 대중화됨에 따라 점점 가격이 내려갔다. 그래서 50만원 정도에도 마음만 먹으면 금강산을 갈 수 있는, 보다 자유롭게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유예해둔 미래가 현재가 되기도 전에, 그러나 금강산은 또다시, 어쩌면 외할머니가 영영 다시 못볼지 모르는 그리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금강산 관광객이 피살되는 불행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 정권이 바뀌면서 대북정책에도 변화가 생겼고,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이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전후관계는 불분명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는 사이, 외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홀로 남은 할머니도 기력이 쇠해지시면서 이제는 혼자 거동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별반 다르지 않게 보내고 계신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마음에 걸린다. 할머니가 살아 생전에 고향땅을 밟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몸도 문제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적 제약과 환경이 더 큰 문제는 아닐까.

 

대북사업을 논할 때마다 경제적 실익을 따지게 되기 마련이다. 국가가 막대한 손실을 떠안으면서 산업을 이끌어가기에는 무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을 품고, 사람을 보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손익보다 우선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합리성과 경제성은 인간의 가치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스무살에 이미 금강산을 밟았던 나는 10년 후에는 그때보다도 더 진일보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겠지만, 사실상 정치적 시련 앞에 놓여 옴싹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할머니는 할머니의 고향 황해도에 얽힌 추억을 제대로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해지셨다. 할머니의 과거가 이제야 더 절실하게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졌는데 말이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했다. 그 변화가 후퇴의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변화의 혜택을 누리기까지 할머니가 조금만 더 오래오래 살아계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