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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한라산을 고집해야 할 특별한 이유

 

 

태풍에 맞서면서까지 한라산을 고집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사실 없었다. 이번이 아니어도 올 시간과 기회는 충분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이 상했다. 수요미식회에 나온 명진전복을 못 먹게 되었다는 것보다 평대리 해안도로를 덮치는 파도 앞에 발이 묶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심지어 나중에는 속이 쓰렸다.

 

숙소로 돌아와 흠뻑 젖은 옷을 정리하며 급기야 한라산을 못간다면 이번 제주 여행은 안한거나 다름 없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렸다. 한라산도 못 가게 된 화요일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어느 것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그냥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앞이 안 보이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하지 못하고 끝까지 맞서려는 내 행동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그제서야 마음이 풀렸다. 물론 710번 버스에서 비자림을 가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달라졌을지 모를 일.

 

애태웠던 태풍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수요일은 날이 정말 맑았다. 그 태풍 덕분에 모기나 벌레 한 마리 없이 한라산을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이냐는 산악회 아저씨 말을 들으니 태풍에 고마워 두 손이 빨개질 때까지 물개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백록담을 본 것도 태풍이 지나간 덕분이었다.

 

한라산을 오르다 도중에 포기하고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한라산 자체를 못가게 되리라는 건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월요일 오후부터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한라산, 그게 뭐라고.

 

올라가면서 몇 번 후회했고 다시 가라면 갈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게 뭔지 속시원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수많은 실패와 계획 변경으로 무계획이 삶의 계획이 돼 버린 내가 아주 오랜만에 세운 계획이자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바로 한라산 등반이었다는 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 목표가 달성되는 어느 날, 그 한라산이 내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