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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리뷰] 게으른 삶

 

 

 

“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게으른 순간들. 나는 항상 그런 게으른 순간들을 사랑한다. 빨래를 널어놓고 한숨 돌리는 시간, 카페에 늘어져 차를 마시는 시간, 햇빛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시간,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시간, 그런 순간들로 삶이 채워지기를 언제나 바라왔다.”

 

‘게으른 시간 속에서 더 많이 사랑하기를 빈다’는 작가의 말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으로 이종산 작가의 <게으른 삶>을 읽기 시작했다. 낯선 타국, 골목에서 길 헤매는 시간을 즐기는 나는, 작가 역시 ‘진짜’ 이야기는 한발 물러나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설을 다 읽고도 한참이나 평을 쓸 수 없었다. 너구리를 닮은 겁 많은 여자아이와 참치 통조림을 가지고 다니는 담백한 남자아이의 연애 이야기라는데 이견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조하지도 않아서다. 둘의 관계는 친구와 연인 사이 언저리에서 모호하게 이어지며, 그것을 연애라 하더라도 그 온도 자체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아무렇지 않게 성관계와 기술을 얘기하는 시대에 이토록 느리고도 흐릿한 ‘연애’ 혹은 ‘썸’이라니.

 

너구리(나)는 오랫동안 참치를 짝사랑하면서도, 마음의 진로를 정하지 않는다. 마음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굳이 끝장을 보지 않아도, ‘DHA가 풍부한 물고기가 좋다’는 너구리의 말에 ‘좋아하는 동물이 얼굴이 빨개지는 너구리로 바뀌었다’ 말할 줄 아는 참치가 곁에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행사 마지막 날인 치킨집을 애써 찾아 나섰다가도 안 보이면 다른 곳을 찾아가는 식의 사소한 일상은 언제나 함께 해왔고, 일상을 채우는 수많은 대화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를 향하기 시작한 ‘마음’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관성을 지니며, 결국 결정적 순간, 폭발하게 된다는 데 있다. 막막해져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너구리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에 휩싸이고 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상처 받기 두려워 마음에 솔직해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따라서 누구에게도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너구리는 알고 있다.

 

애써 억눌러 왔던 마음은 그래서 점점 고개를 내민다. 케르베로스에게 잘해주는 참치에게 내뱉는 말은 실은 너구리에게 잘해주는 참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처럼. “잘해주지 마. 넌 주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가면 케르베로스는 기다릴 텐데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내가 틀려?” 기다리지 않겠다는 너구리의 말 역시, 사실은 끊임없이 떠나는 참치를 내내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기다림의 끝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참치는 여러 번 훌쩍 떠났다가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당분간은 괜찮아. 돌아오면 그렇게 말했다. 참치는 오래 버티고 있었다.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침대 밑에 숨겨두고. 머리맡에 있는 여권을 들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고. 깊은 밤과 이른 아침 사이의 시간에 전화를 걸어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래서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참치에게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을까.

 

저 우산을 타고 참치가 내려온다면 물어봐야지. 그리고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다고 대답하면 다음에도 그래달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기껏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는 이런 생각. 한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p97)

 

참치의 집에서 머무는 날에게 옹졸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더욱 커진 너구리의 짝사랑은 이제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희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린 영수처럼, 자신의 마음에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보기로 한다.

 

“나도 내기를 해볼까? 여기서 뛰어내리면 참치를 정말 그만 기다리는 거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난 더 이상 참치가 겁쟁이라고 무시하는 너구리가 아니고 날 한 번도 잡은 적 없는 그애를 기다리는 것도 그만두겠다. 고백하고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나도 끝내겠다. 나는 난간을 잡고 발을 올렸다.”(p100)

 

실패가 두려워 회피하고, 귀찮아하고,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또한, 마음에 일종의 부담감과 책임감을 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남녀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과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방식의 연애가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지를 실패한 지난 연애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함께 떠나자는 참치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남기를 택한 너구리의 결정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너구리다운 결정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산한 새벽 거리를 떠돌다 참치를 생각한 너구리가 더 이상 막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평화로운 시간 가운데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또렷한 순간을 자주 마주하기를. 어떻게 끝맺음을 내야할지 몰라, 시작처럼 끝도 작가의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이 세계 혹은 진실은 언제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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