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남자

피아노 치는 남자(piano man)

5월 6일, 석가탄신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늘은 숨이 멎을 정도로 맑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맑은 것이 어떤 것인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다만, 눈이 부셨고 뜨거웠고 뜨거운 공기가 마치 진공 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정도의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 듯 하다. 나를 잘 따르는 친구이자 동생인 최 모양은 소개팅했던 썸남과 남양주 카페 놀러간다며, 대만 출장에서 돌아온 그가 가져온 선물이 무엇인지 받자마자 보고하겠다며 들떠 카톡을 보냈다. 이제 거의 반평생을 함께 지내온 절친 중 한명은 그간의 피로를 날려버리겠다는듯 경주가는 기차 안에서 이동 보고식 카톡을 보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맑은 하늘을 내려다보면서도 들뜨지도, 기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조용한 마음으로, 늘 그렇듯 스토리를 쏟아내는 최 모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친구가 경주가는 기차 안에서 보내온 카톡에 '좋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공휴일에 더 바쁜 동생은 출근했고, 부모님은 석가탄신일 기념 새벽부터 절에 가셨다. 집에는 나 혼자였다. 오롯이 혼자였던 시간이 언제였던지 기억나지 않기에 이 짧은 시간은 귀했고, 귀한만큼 달콤했다. 나는 책도 읽고, 신문도 보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싶었으나, 만사를 제쳐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티비를 켠 것이었다.

TV를 켰네.

마침 밀회가 방송 중이었다. 꾸준히 열심히 보지는 않았으나 대강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기에, 재방송 중인 드라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12회였다는 것은 piano man을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 내가 본 부분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오혜원 실장(김희애)는 이선재(유아인)와 모두의 눈을 피해 밀월여행을 떠났다.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오혜원은 천재 소년 선재에게 자신의 스토리를 말하면서 한 노래를 들려준다. 

피아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을 한 여자가 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음악이란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열정만으로 하기 힘든 분야다. 그 여자에게는 음악적 재능보다 현실 파악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도 결코 하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다소 많이 부족했을 뿐이다. 두루두루 여러 면에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여자는 그래서 음악을 완전히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을 택한다. '안전한' 길을 말이다. 부유했으나 음악적 재능은 없던 친구의 보모, 혹은 수행비서가 되는 것이었다. 여자는 능력이 없어도 집안의 재력 덕택에 앞날이 보장되어 있는 한 친구, 솔직히 친구라 부를 사이는 아닌 그 친구를 보좌한다는 조건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여자는 그 친구에게는 수족이 되고, 그 친구 아버지에게는 눈과 귀가 된다. 주말마다 친구가 클럽에 가고 나면, 여자는 클럽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혜원은 클럽 근처 술집에서 늘 같은 노래가 나왔다고, 선재에게 얘기한다. 선재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묻는다. 혜원은 지독했던 유학생활, 자신을 위로했던 단 한 곡을 선재에게 들려준다. 

Billy Joel의 piano man, 피아노 치는 남자

드라마 BGM으로 흘러나온 이 음악은 처음에는 들릴 듯 말듯하게 시작되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들었다. 선재는 집중했고, 혜원은 눈을 감았다. 

"토요일 밤 9시, 허름한 바에 찾아온 더 허름한 늙은 남자, 그리고 다가와 연주를 청하더니..."

노랫말이 흘러나올수록 음악은 점점 커졌고, 헤원은 웃었다. 웃었고, 웃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터져버린 울음을 더 커진 음악소리가 덮었다. 음악은 점점 커졌고, 2절까지 전부 흘러나오고서야 밀회의 12회는 끝이 났다.

밀회의 엔딩신에 호평이 가장 많았던 회는 혜원이 선재의 방에 처음으로 간 날 그 밤의 영상일 것이다. 둘이 잤는지, 안잤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황. 가지런히 놓인 신발과 어두컴컴한 계단, 시멘트벽에 대강 구색맞춰 놓은 부엌과 화장실 세수대야 등등. 그 여러 오브제들이 등장했던 회 말이다. 나 역시 그 엔딩신이 대단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더 좋았던 엔딩신을 꼽자면 그것보다는 12회 피아노 치는 남자가 흘러나왔던 저 장면이다. 

혜원이 처절하게 현실의 벽을 느끼고 무너지고 좌절해야 했을 그 유학길에서 위로받을 수 있던 이유가, 그리고 선재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울 수밖에 없던 이유가, 너무도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billy joel의 노래 piano man 가사는 빌리 조엘의 실제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지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빌리 조엘이 무명이었을 때, 허름한 재즈 바에서 밤마다 피아노 연주를 했다고. 그리고 그 바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중년의 단골 손님이 있었다고 말이다.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지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졸린 것 같기도 했던 그 중년의 남자는 어느 날 빌리 조엘에게 노래 한곡을 청했다고, 했다. 이것은 아주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빌리 조엘이 유명해진 뒤에야 그런 일화가 밝혀졌다고. 그래서인지 배경을 알고 piano man을 다시 집중해서 듣다 보면 마치 그 허름한 바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 빌리 조엘과, 빌리 조엘을 찾아온 초로의 사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노래를 들었던 20대의 혜원은 생각했을 것이다. 무명이 길었던 빌리 조엘처럼 지금 당장 자신의 처지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자존심이 상해도 언젠가 빌리 조엘처럼 웃으면서 자신의 암울한 20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위안받았을 것이다. 세계적인 팝 가수인 빌리 조엘조차도 무명 시절, 바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연명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데에서. 

40대가 된 혜원은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piano man을 들으면서 위로해야했던, 그리고 살기 위해 의지를 다져야 했던 자신이 꿈꾸고 바래온 40대의 삶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빌리 조엘은 세계적 가수가 되었지만 결국 자신은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는 20대의 삶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지지 않았구나. 피아노를 사랑했던 한 여자는 피아노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돌아보니 '안전한' 길은 피아노와 참 많이도 '멀어진' 길이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나의 지나친 평일지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청자의 것이라면 이런 내 평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piano man을 들으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만 오혜원에게서 이 감정을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한, 무언가 이루기 위해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고, 그러나 그 노력에 대한 대답이 기대와 다르게 돌아오고, 때문에 실망해야 했던 누군가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처럼. 내게도 piano man이 위로곡이었던 개인적 이유가 있듯이, 그 누군가에게도.

특히나 오늘 같은 밤.

Piano man

It's nine o'clock on a Saturday

토요일 9시

The regular crowd shuffles in

평소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There's an old man sitting next to me

늙은 남자가 내 옆에 앉아서

Makin' love to his tonic and gin

진토닉을 마시고 있지

He says, "Son, can you play me a memory

그는 말했어, "얘야, 내 기억을 연주해줄 수 있겠니

I'm not really sure how it goes

정확히 어땠는지는 기억 나지 않아

But It's sad and it's sweet and I knew it complete

근데 슬프고, 달콤하고, 완벽했던 것 같아

When I wore a younger man's clothes."

내가 더 젊었을 시절에는 말이지."

La la la, di da da la la, di di da da dum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피아노맨

Sing us a song tonight

오늘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Well,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우린 모두 멜로디가 듣고 싶고

And you've got us all feelin' all right

당신은 우리 모두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요

Now John at the bar is a friend of mine

술집에 있던 내 친구 존은

He gets me my drinks for free

내게 술을 공짜로 줘

And he's quick with a joke and he'll light up your smoke

그는 재치있게 농담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주지

But there's some place that he'd rather be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 있고 싶어 해

He says, "Bill, I believe this is killing me."

그는 "빌, 나 미칠 거 같아." 라고

As his smile ran away from his face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며 말했지

"Well, I'm sure that I could be a movie star

"나는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If I could get out of this place."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Oh, la la la, di da da la la, di da da da dum

Now Paul is a real estate novelist who never had time for a wife

폴은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 없는 부동산 소설가야

And he's talkn' with Davy, who's still in the Navy

그는 해군에서 일하고 있는, 평생 일할지 모르는

And probably will be for life

Davy와 이야기하고 있어

And the waitress is practicing politics

웨이트리스는 정치를 실천하고 있고

As the businessman slowly gets stoned

회사원은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지

Yes, they're sharing a drink they call loneliness

그들은 외로움이라는 술을 나눠 마시고 있지만

But it's better than drinkin' alone

혼자 마시는 것보다야 낫지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피아노맨

Sing us a song tonight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Well,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우린 모두 선율이 듣고 싶고

And you've got us all feelin' all right

당신은 우리 모두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요

It's a pretty good crowd for a Saturday

토요일에 걸맞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

And the manager gives me a smile

매니저는 날 보고 웃지

Cause he knows that it's me they've been comin' to see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To forget about their life for a while

날 보러 왔다는 걸 알고 있거든

And the piano, it sounds like a carnival

그리고 피아노 소리가 마치 축제 같아

And the microphone smells like a beer

마이크에서는 맥주 냄새가 나지

And they sit at the bar and put bread in my jar

그들은 내게 빵을 주며 술집에 앉아서

And say, "Man, what are you doin' here?"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지

Oh, la la la, di da da da la la, di da da da da dum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피아노맨

Sing us a song tonight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Well,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우린 모두 선율이 듣고 싶고

And you've got us all feelin' all right

당신은 우리 모두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