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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세월호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을 지켜보면서

1.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여름의 일이다. 

나는 모 신문사 인턴기자가 되어 첫 취재 지시를 받고 택시를 탔다.

내가 간 곳은 일원동 삼성의료원. 애석하게도 첫 취재가 고시원 화재로 가족을 잃은 유족 인터뷰였다.

택시에 타자마자 사고 관련 기사를 검색했고, 친구에게 전화 걸어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유족에게 건넨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무엇을' 물어보아야 하는지

그 어떤 가이드라인도 받지 못한 채 도착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 없이도 멘트를 딸 줄 알 때 

비로소 진정 기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라는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혀

나는 떨리는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장례식장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고는 사망자 이름이 붙은 빈소를 찾아갔다.

묻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빈소 근처엔 나만큼이나 어리숙한 기자가 서넛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처 빈소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망자의 고모라는 분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 눈빛은 매서울 만큼 차가웠다.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돌아가라고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당연한 거절과 냉대를 무릅쓰고 사연을 캐내야 하는 것이 기자의 할일이었다.

나는 다시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건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심한 욕설이었다.

그것 역시 당연한 처사였으나 준비가 부족하고 어리숙했던 나는 욕설과 윽박지르는 소리게 그만 기가 죽어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엉엉 울었던 기억이다. 


8년 전 나는 취재를 못했다는 것보다 심한 욕설에 눈물을 흘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욕 들었다고 우는 건 분명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장례식장을 찾으면서 옷차림새 한번 훑어보지 않았던 나의 태도가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날의 옷차림은,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반팔 티셔츠에 면바지였다.

누가봐도 망자에 대한 조의를 표하는 차림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빈소를 찾았으면서도 정작 고인에게 인사 한 번 하지 못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기자이기 이전에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나 예의 정도는 마땅히 지켜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야할 도리를 몰랐던 나의 얕음이 지금이라고 얼마나 깊어졌을까 싶지마는. 그래도 적어도 그때 참 많이 얕고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2.

8년 전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오른 건 

세월호 생존 여고생에게 같은 학년 친구가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만 앵커 때문이다. 

앵커 머릿속에는 그 어떤 예의나 가치보다 생존자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했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가 죽었다는 질문을 하게 되면 그가 평소 어떤 친구였는지를 누구보다도 먼저 물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존자든 유족 혹은 실종자 가족이든 엄청난 사고를 당한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전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퍼즐처럼 잘 엮어 사고의 인과관계나 전후사를 파악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장을 확인할 수 없는 기자에게 그들의 멘트는 현장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는 증거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렇게 엄청난 사고 앞에서 기자들은 누구보다도 신중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깊게 사고해야 한다.

기자의 질문이 무엇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고, 그 대답에 따라 사고의 진위가 밝혀지는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남의 마음을 불편하고 아프게 만들면서도

끝까지 질문을 해야하는 데는 드러나지 않은 혹은 파악되지 않은 사건사고를 꿰맞춰보기 위해서라는데 

그 질문의 존재이유가, 질문하는 자의 명분이 있다.


3.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고를 바라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다.

구조된 생존자들은 정신을 가다듬지도 못한 채 배가 갑자기 기울고, 침몰했던 일련의 과정을 얘기해주었다.

생존자들의 공통된 증언은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경위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실종자 가족들로부터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전해야 할까.

수색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조는 몇 차례,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지이며

그렇게 되고 있지 않다면 문제점은 무엇인지, 당장 무엇이 가장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해져야 관계당국과 관련자들의 처리 속도가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멘트를, 당장의 문제를 전하는 언론은 많지 않았다. 아니 너무도 적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뉴스는 기상 악화로 구조작업이 어렵다느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색작업이 이루어졌다느니, 공기가 주입되고 선내 진입이 성공했다느니의 결국엔 허위로 밝혀진 거짓 정보들뿐이었다. 

뉴스를 보고 있어도 배가 침몰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일련의 과정과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믿을 수조차 없는 뉴스를 보면서 그 어떤 정보와 진실을 전해듣기란 너무 큰 기대일지 모른다. 


물론 분명 현장에서 기자들은 진실을 알고, 알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더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힘이 없는 자는 입이 없기 때문이다.


4.

언론이 아니어도 너무도 쉽게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언론이 이들과 다른 것은 오직 '사실'과 그 사실에 기반한 '진실'을 전하는 유일한 매체라는 데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믿고 지켜보는 것이다. 한때 기자를 준비했던 나로서는 확인되지 않는 SNS를 그대로 보도하고, 크로스 체킹이나 팩트 체킹이 안된 인터뷰이를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가 안타깝기만 하다. 당장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진행 속도에 박차를 가해야 할 언론이 사망자에 관한 선행이나 미담 기사를 전하는 모습이 변죽만 올리는 거 같아 정말 너무나 안타깝다.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눈과 귀로 본질에 다가서야 할 언론이 사망자 보험금이나 전하는 천박함에 치가 떨리기까지 하다. 


물론 미확인된 '희망'과 '기대'와 '예상'에 기댄 추측 보도만 하는 것 또한 우리가 생각해온 언론의 모습은 아니다.


이제는 정말 

현장을 찾은 정치인의 모습이나

살아나온 자들의 증언을 조합한 스케치보다

미중일 같은 우방국이 애도를 표한다는 힘 없는 보도보다


그래서 언제, 누가, 어디서, 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닐까.


누가 구속되고 수사를 받는다는 소식보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하는지가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깜깜하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떨고 있을 소중한 생명들을 위해서 말이다.


5.

제발 하루빨리 좋은 소식이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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