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아빠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사소한 것부터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창 화장하느라 바쁜 내 곁에 다가와 아침부터 말을 건다거나, 구두를 신고 있는데 현관 앞으로 와서는 나이가 들어보이니 이제 머리스타일을 조금 바꿔보는게 어떠냐는 것. 일상의 잔소리는 줄곧 엄마 몫이었으나 이제 점차 아빠에게로도 옮겨가는 듯 보였다. 이런 것쯤이야 십수 년 간 엄마에게 귀가 닳도록 들어온 것이니 때때로 귀찮게, 또 때로는 기분 나쁘게 들리더라도 엄마가 아빠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익숙하고도 오래된 것이라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작 내가 낯설고도 어색한 것은 다른 데서 예고도 없이 문득문득 찾아왔다. 아빠는 종종 엄마 부탁으로 찬거리를 사러 가까운 동네 시장을 나갈 때가 있었다. 물론 엄마 부탁이 아니더라도 아빠는 환한 낮 시간, 자주 마실을 나갔다. 이발을 하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아빠는 그렇게 나가기 전마다 꼭 내 방에 들렀다.
"뭐 필요한 거 없니?"
이발, 장보기, 운동 등 매번 이유는 달라도 아빠가 내게 묻는 말은 늘 같았다. 필요한 것이 없냐는 것. 없다고 말해도 아빠는 단박에 돌아서지 않고, 또 물었다. 이번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디야에 들러 (너가 좋아하는) 커피 사다 줄까?"
매번 묻는 말에, 나는 매번 '아니요' 또는 '됐어요', '싫어요'라고 답했다. 언제나 늘, 어김없이. 일단 동생 덕분에 집에서도 커피 전문점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정도의 커피 맛내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고, 굳이 아빠 돈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몇 천원 안되는 커피일지라도. 그런데 번번이 퇴짜 아닌 퇴짜를 놓는 내가, 아니 대답하는 내 태도가 굉장히 귀찮고 신경질적으로 아빠에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아빠가 귀찮은 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매번 방문을 열고 나갈 적마다 물어보는 아빠가 귀찮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날, 아빠는 동생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네 언니는 뭘 사다줄까 물어볼 적마다 '싫다'고만 하더라."
그게 아빠가 귀찮아서도, 아빠가 싫어서도 아니었지만 아빠는 서운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나쁜 마음과 의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의 투정 아닌 투정도, 목소리도 잊은 채 지냈다. 다만 아빠가 퇴직한 뒤로 왠지 내가 아빠에게 부리는 투정과 짜증이 늘었다는 것은 잊지 못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쓰였고, 돌아서서 후회했지만 이상스럽게도 번번이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항상 말과 행동에 더 많이 앞섰다. 나는 나빴다.
엄마에게 늘 혼이 나면서도 술이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옷걸이에 옷을 삐뚤게 거는 아빠의 오래된 습관과 천성이 느긋한 아빠의 마음가짐을, 내가 어쩜 그렇게도 쏙 빼닮았는지 모르겠다며 엄마가 얘기할 적마다 나는 괜히 아빠를 부정했다. 에이, 그럴리가. 아빠랑 내가 뭐가 똑같아. 닮긴 뭐가 닮아. 아빠랑 내가 얼마나 다른데, 라면서 나는 괜히 아빠 흉을 보며 그런 아빠와 내가 닮았다는 엄마 말에 계속 반박을 했다. 그래도 엄마는 너는 하다못해 신발 벗는 모양까지 아빠를 닮았다며 부전여전이라고 했다.
집에서 빨래나 설거지는 고사하고, 라면 하나 손수 끓여먹는 일이 드물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청소는 아빠가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아빠 때문에,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에게 엄마보다도 더 불만이 쌓여갔다. 집안일은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예요, 라는 걸 어떻게든 아빠에게 주입시켜 아빠의 태도를 바꿔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굴었고. 그래서 아빠와 나는 늘 사소한 싸움이 잦았다. 싸움은 늘 감정이 상한 뒤에야 끝이 났다는게 문제였다.
퇴근한 아빠가 빨래와 청소, 심지어 반찬이 없다 싶은 날에는 손수 김치찌개까지 끓여 먼저 저녁준비를 해놓는다는 친구 아빠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없이 친구의 아빠가 부러웠다. 그래서 괜히 나도 모르게 작년부터 몸이 많이 안좋아진 아빠의 건강상태를 알면서도, 아빠한테 엄살부리지 말라고, 마음을 강하게 먹으시라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니 아빠와의 사이가 더 멀어질 수밖에.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게 된 건 고혈압 때문에 회사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따로 사시는 아빠를 둔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다.
"몇 십 년 동안 사신 아빠를 니가 무슨 수로 바꿔. 아빠가 평생 회사 생활하면서 고생하셨는데, 이제 좀 편하게 지내시라고 해라. 그리고 몸도 안좋으신데, 아, 우리 아빠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니가 고생스럽더라도 그냥 다 해드려."
우리 아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
이 말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빠와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건강이 안좋아졌는데도 단 30분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 아빠에게 운동은 너무나 절실했다. 오랜만에 가는 아빠와의 산행은 참 어색했다. 한때 내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을 엄마보다도 먼저 아빠에게 털어놓을 만큼 나와 아빠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친구와의 만남, 여행지에서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까지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아빠는 말이 없었고, 나는 구태여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러다 하루, 이틀, 한주, 두주 산을 다니면서 평상시 하지 않았던 고민이나 걱정을 점차 얘기할 수 있게 됐다. 산이란 그런 것이니까.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산에서는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게 등산인 것이다. 돌탑을 지나기 전, 나는 미리 챙겨둔 돌을 아빠에게 주며 소원을 빌라고 했고, 나는 내 돌을 올리면서 엄마, 아빠의 건강을 빌었다. 어떤 날에는 아빠가 나보다도 먼저 돌탑에 올릴 작은 돌멩이를 챙겨두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점차 아빠에게 응어리 진 나의 마음을, 아빠에 대한 뒤틀린 내 마음을 풀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늘 나보다 앞서 산길을 걸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던 아빠의 뒷모습을, 어느날 우연히 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근래 들어 아빠는 내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더 많이 보지 않았을까.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면서, 방문을 열고 커피를 사다줄지 조심스레 물어보면서, 아빠는 내 뒷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새벽까지 불켜진 방을 보고는 언제 잘거냐고 물어보면서, 아빠는 먼저 잘게,라고 말하면서 아빠는 내 뒷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뒷모습을 먼저 보았을 아빠를 생각했고 그러다 깨닫게 됐다. 커피를 사다줄까 물었던 것이 아빠가 나를 생각하는 그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커피 사다줄까에는 실은, 너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다줄까에 '너가 좋아하는'이 빠진 것뿐이었음을. 그게 한때 잘나가는 대기업 부장이었던 시절의 아빠가 고가의 DSLR를, 고가의 명품 가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사주었던 그때에나, 이제는 퇴직해 엄마에게 용돈을 받는 아빠가 몇 천원의 커피 한잔을 조심스레 사주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아빠의 마음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빠가 사주려던 게 가방이나 옷이 아니라 커피였다고, 아빠의 마음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
물론 나는 아빠에게 일일이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아빠가 물어올 때마다 '좋아요', '짱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해내갔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우리 아빠를, 그 아빠와 함께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하나씩 나눠가면서. 그리고 생각했다. 머잖아 나는 아빠를 '아버지'라 부를 날이 올 것이다, 라고.
"돌아오는 길에 이디야에 들러 너가 좋아하는 커피 사다 줄까?"
이제 나의 답은 하나로 수렴된다.
"좋아."
그러고보니 냉철하고 칼같던 젊은 시절의 아빠가 이제 정말 많이 늙은 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마음을 살피고 눈치를 보아주는 조심스러운 아빠가 이제 정말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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