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는 휘발되는 글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개인적 경험과 감상이 보편적 공감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때로 자기만족과 자기허영이 투사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읽고 나면 오히려 쿨하지 못한 나와 더욱 초라해진 자신을 맞닥뜨려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 김중혁 작가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준 작가다.
사실 김중혁 작가를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아는 게 없을지 모른다. 그나마 내가 아는 사실도 누군가에 의해 재가공된 기록이다. 그런 사실들 중 눈길을 끌어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그에 관한 단서가 있기는 하다.
김중혁 작가
김중혁 작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알다시피 그는 김연수 작가와 오래 전부터 절친이었고, 김연수 작가가 등단한 뒤에도 그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등단을 했다. 그의 절친 역시 대학입시에 실패했다고는 하나 서울 명문대에 입학한 반면, 그는 인서울이 아닌 비서울대, 지방대에 입학을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입학하고 안하고가 큰 문제는 아니나, 대학이 어디냐에 따라 모든 판단을 서둘러 내리는 이 사회의 정서를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생각하기로 김중혁 작가 역시 이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 피해의식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는 작가가 되었고, 국문과를 진학한 본인은 작가가 되지 못했고. 김연수 작가는 스물 초반, 김중혁 작가는 서른에 등단한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이와 별개로 그는 다재다능하다.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온갖 기계를 분해했다가 새로운 기계를 만들만큼 기계에도 능통하다. 음악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 게다가 그의 마음은 재능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등단을 하고 몇 권의 소설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자신을 낮출 줄 알며(빨간 책방을 통해 느끼게 된 감상이랄까), 때로 별 볼일 없다는 생각도 더러 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생각을 곧잘 하는데, 그것은 그가 마흔이라는 나이를 그저 먹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흔을 넘기까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르나(혹은 없었을 지도) 크고 작은 일들에 의연해지고, 깊어졌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하는 데도 그가 전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대단한 작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할까. 일종의 동일시하기 효과일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20분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천장을 본다'는 식의 이야기를 비롯해 앞서 언급한 김중혁 작가에 대한 여러 팩트들을, 나는 그가 쓴 책보다 그가 말한 방송, 그가 김연수 작가와 연재한 씨네21 기사, 또 그를 인터뷰한 기사들을 통해 접했다. 작가의 창작물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커녕 보지도 않고 작가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한 셈이다. 그러니 김중혁 작가를 좋아하는 작가라 꼽으면서도 선뜻 애독자라 말하지 못한 이유다. 책을 읽지 않고도 이만큼 매력 있는 작가인데. 그동안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물론 <악기들의 도서관>, <뭐라도 되겠지> 정도는 완독했으나 애독자라고 한다면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읽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모든게 노래>를 읽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김중혁 작가가 더 좋아졌고,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같이 노래방을 가자고 하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민낯을 공개해야 하는, 작가의 고충이 응집된 에세이를 내가 그동안 너무 쉽게 보았구나, 반성했다.
모든게 노래
이 책은 음악에 얽힌 개인적 경험과 그 기억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다. 음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인데, 어떻게 텍스트로 전하면서 독자와 소통할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음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삶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에 작가가 언급하는 음악을 모르더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서두에 작가는 모두 자신만의 노래가 있을 것이니, 그 노래를 잊지 않고 부르기를 권한다. 노래를 잊는 순간, 우리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둘러보면, 모든게 노래라는 작가의 말처럼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노래를 부르고, 듣고 나누었던 지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추억여행을 할 수 있었다. 기자가 되기 위해 면접장을 갈 때마다 주문처럼 들었던 이승환의 '슈퍼 히어로'가 생각났고, 430킬로미터 국토완주를 하는 매일 아침마다 기상곡으로 들었던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 떠올랐다. 그가 잠들기 전 휴대폰으로 불러주었던 'try to remember'와 새학기 환영회, 새로운 만남 때마다 불러 별명이 오리가 되었던 체리필터의 '오리날다' 그리고 한달 넘게 새벽 퇴근을 하면서 열성을 다했음에도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왔던 밤 회사 사수가 보내주었던 김범수의 '지나간다'와 Daniel powter의 'bad day'까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분명 인생의 매 순간 음악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모든게 노래라는 폴더를 만들어 글을 쓰기로 결심까지 했을까.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시간을 계속 흐를 테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음악을 계속 들을 테니 이야기는 매마르지 않으리라.
그뿐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 생각한다는 구절, '사람이 노래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은 그 노래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사랑도, 물건도 마찬가지'라는 부분, '음악을 음악으로만 대했던 대학 시절을 지나 이제 뒷모습, 옆모습을 더 유심히 보게 되면서 음악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말처럼 깨달음을 주는 부분도 많아 몇 번을 곱씹어 읽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음악과 멀어지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필사에 재미 들린 나는, 잊고 싶지 않은 구절을 이렇게 옮겨 적었다. 작가의 생각이 내 마음으로 전해지는 기분이라 좋다.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파트로 나누어져 있고, 곳곳에 삽입된 그림과 손글씨는 역시 '김중혁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장으로 나누었다. 계절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지만, 계절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많다. 채소에 소금을 치면 샐러드가 되듯, 날씨에 노래를 처야 비로소 계절이 되는 것 같다.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계절은 훨씬 흐리멍텅했을 것이다. 봄꽃은 덜 아름다웠을 것이고, 여름은 덜 더웠을 것이며, 가을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겨울은 덜 추웠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다.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찬찬히 들어보다가 또 하나 발견한 게 있다. 모든 목소리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이거나 자신감 없는 목소리이거나.
두 종류의 목소리에는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에는 여유로운 매력이 있었고, 낯가림이 심한 목소리에는 조심스럽고 수줍은 매력이 있었다. 편집을 해보니 어떤 목소리가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여유로운 목소리만 계속 이어지니까 어쩐지 심심하고, 낯가림 심한 목소리만 붙여 놓으면 불안해서 들을 수가 없다. 두 종류의 목소리가 잘 섞여야 듣기에 편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그 사람을 잘 드러내는지 새삼 깨달았다."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위로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방을 정리하다 스무 살 무렵의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모아두는 편도 아니라서 20년 전 사진 속의 내가 낯설게만 보였다.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참 많이 변했다. 사진 속 모습보다 주름이 늘어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표정도 참 많이 바뀌었다. 스무 살 때의 내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아까운 지면을 사진으로 낭비할 수 없기에 말로만 설명하자면, (지금에 비해서 젊고 잘생겼지만 사진 속의 내 표정은) 참 우울하다. 분명히 웃고 있는 얼굴인데 뭔가 침울하고 울적한 기운이 사방에 안개처럼 피어 있는 게. 사진 속에다 말풍선을 달아본다면 ‘흥,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을걸’ 쯤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스무 살 때는 ‘이해’를 믿지 않았다. 누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말,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가식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모든 웃음은 비웃음처럼 들렸고, 사람들이 드러내는 슬픔은 과도해 보였다. 그 시절엔 음악도 해비메탈이나 우울한 포크록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헤비메탈 음악의 인기가 높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나 사이에다 음악 벽을 만들기엔 그보다 좋은 음악이 없었다. 세상에 메탈리카의 <...and justice for all> 보다 더 좋은 벽을 어디서 찾겠나.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해를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결론은 여전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언젠가 완료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진행할 수밖에 없는 동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 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이해를 믿지 않고 우울했던 스무 살의 청년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건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텐데, 더 우울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웃기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마음과 관계를 묘사하는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행이다.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래도 명색이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니) 문장이야 틀리지 않게 쓸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얕고 관계에 대한 통찰력도 부족한 내가 제대로 된 소설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그 의문은 여전하고, 좋은 소설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론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위로가 있으며 (예술이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위로를 위해 여러 명의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음퀴방에서 우리가 호명했던 뮤지션들의 이름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1인칭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세계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가 중요했다. 내가 바라 보는 세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향하는 길이 중요했다.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요즘의 내 세계는 ‘3인칭의 세계’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은 무덤덤해졌고,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1인칭의 장점이 있고, 3인칭의 장점이 있다. 1인칭의 세계는 열정적이지만 배려가 부족하고, 3인칭의 세계는 공정하지만 솔직함이 부족하다.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우리가 먼저 외로움을 찾아가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묻게 된다. 손성제의 <비의 비가>는 작아지는 내가 슬퍼서 부르는 노래다. (연인이든 세상이든)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한 후에 느껴지는 슬픔에 대한 노래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텅 빈 가슴 안고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빈 가슴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울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무자비한 시간을 견디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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