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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리뷰]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묘했다. 시간을 두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읽고 싶었지만 읽기 시작하니 속도가 붙어 놓을 수 없었다. 오래 전 사 두고도 끝까지 읽지 못했던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과 달리, 처음으로 완독한 이병률 작가의 책이었다. 바람 선선한 가을에 읽는데, 이상하게도 한 겨울 실내 안 공기처럼 따뜻하고도 추웠다.

 

잔디밭에 누워 읽는 동안 어느 편에서 보았는지 기억 나지 않는 '계절의 민낯'이라는 단어가 계속 생각났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는 바람 냄새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했었던 사람을 생각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읽어갈수록 어떤 사람들이 떠올랐고,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그리운 시간이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어긋나 있다. 제때 전하지 못한 마음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 한 켠을 시리게 하고,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마음은 이미 생명력이 다했다. 끝을 보지 않은 채 남겨둔 마음은 '일부러' 그런 진심이 보이면서 꽤 아쉽다.

 

그래서 작가는 자주 묻는다. 가슴에 맺혀서 지키고픈 무엇을 가졌습니까, 라고 묻고, 그녀는 그곳에 다녀간 것일까, 확인을 원한다. 좋은 날이 많이 있었습니까, 라고도 묻고,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미련을 고백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는 그의 마음도 전해지지 못한 채 글로 남았고, 그래서 큰 파도가 덮쳐도 기꺼이 맞이하고 안녕하겠다고 전한다.

 

어긋났기 때문에 글이 된 건 아니었겠지만,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을 잊지 않았기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센스가 엿보이는 제목과 레이아웃

 

 

*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남의 일에 관심 많고, 남의 시선에 흔들리고, 자신이 아닌 남을 살아가는 먼지 앉은 눈빛으로는 세상의 절박한 그 무엇에도 말을 걸 수가 없다. 우리가 자기를 들여다보지 않아서 우리 눈빛을 잃은 것처럼, 이 세상이 이토록 불안한 구조로 가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서로의 삶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좋은 눈빛에 흔들렸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 인생에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 있게 한다 中 -

 

*

 

나에게는, 그럴 만한 그 무엇이 과연 있는가 하는 나직한 물음이 가슴께에 밀려왔다. 온 마음으로 지키고픈 무엇이, 몇몇 날을 길바닥에 누워서라도 안 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이냐고 울고불고 대들 그 무엇이 가슴 한쪽에 맺혀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걸 지켜내는 데 까짓 두려울 일은 그 무엇일지 당장 알고만 싶어졌던 것이다.

 

- 가슴에 맺혀서 지키고픈 무엇을 가졌습니까 中 -

 

*

 

이토록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음에다 말에다 온기를 실어 세상을 짓고 허물고 하는 작업을 열심히들 하고 있는 걸요. 단풍 든 나무 아래만 서 있어서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구만요. 그리고 이렇게 가을에는 사람들이 거짓말인지 시(詩)인지 모를 말들을, 잘 모르면서도 이해하고 싶은 핑계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있는 걸요.

 

-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中 -

 

*

 

음식 향기로 가득찬 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오면, 마지막으로 한껏 좋은 음식 냄새들을 맡은 다음 그길로 식당을 빠져 나오고 싶다. 먹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내가 가는 길이 제 길이 아니었음 싶다. 길이 아닌 길은 두렵고 아득하겠지만서도 동시에 당신에게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도 할 테니까.

 

행복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가 행복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사는 거라면, 행복보다 진정 더 큰 무엇의 가치가 있기는 한 것 같으니 그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눈물이라는 감정만 사용했으면 싶다. 상처라는 말에 끌려다니기보다는 무시라는 감정으로 버텨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저 일과 안 좋은 이 일이 겹쳤으면 한다. 그 국면을 뛰어넘기 위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에너지를 쏟게 될 테니, 그런 다음 엄청난 기운으로 솟구쳐 되살아날 테니.

 

마취를 해도 마취가 안 되는 기억의 부위가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그것으로 가끔은 화들짝 놀라고 다치고 앓겠지만 그런 일 하나쯤 배낭이라 여기고 오래 가져가도 좋을 테니.

 

- 지금으로부터 우리는 더 멀어져야 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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