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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

[만추] 사랑이란 네가 마음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만추] 마음을 되찾도록 기다려주는 다소 느린 사랑 영화


 

만추를 왜 이제야 봤을까?

쓸쓸하고, 음울하고, 조용하지만 조심스러운 듯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두렵지만 믿고 싶은 애나 첸(탕웨이)의 눈빛, 무표정 속에 드러나는 복잡한 감정을 

탕웨이가 아닌 누군가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을 의심한 남편에게 맞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남편을 죽이는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애나. 애나는 피할 길 없이 수감생활을 시작한다. 7년 동안 숨죽여 살던 그녀가 감옥을 나오게 된 건 엄마의 죽음.


그녀에게는 72시간의 제한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엄마의 죽음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건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집에 돌아왔지만, 낯설고 어색해보인다. 

엄마의 죽음보다도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무표정, 무감정이다.


애나는 시애틀 거리를 걷다 쇼윈도에 걸린 옷을 입어보고, 그 자리에서 산다. 하지만 그녀의 죄수번호와 위치를 확인하려는 감수의 전화에 허둥지둥 놀라더니 방금 산 옷과 귀걸이를 하루도 하지 않은 채 벗어버린다. "이건 나와 맞지 않아." 라고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멈춰버린 생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와 만난 순간부터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처음 훈(현빈)을 만난다.


접대부인 훈은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듯 했고, 그래서 버스 티켓을 예매하지도 못한채 버스에 오른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훈은 능청스럽게 애나에게 30불을 빌리고, 애나는 줄듯말듯 말없이 그를 쳐다본다. 괜히 엮여 피곤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30불을 줘버린다. 훈은 자리로 돌아와 30불을 갚을테니 자신의 시계를 잠시 맡아달라면서, 휴대번호를 함께 건넨다. 


하지만 애나는 시애틀에 도착하자마자 번호가 적힌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다 우연히도 그녀가 새로산 옷을 화장실에 벗어버리고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72시간이 주어졌지만 엄마의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어디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애나는 자신 앞에 나타난 훈에게 자자고 한다. 허름한 호텔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그만둔다. 여기에 훈도 딱히 화를 내지도, 다그치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할 뿐. 


둘은 이렇게 애매모호하고도, 어정쩡한-혹은 어떤 책임과 부담도 가질 필요 없는 가벼운 상대로 시애틀 관광을 한다.



서로 말도 없이, 가만히 관광 셔틀버스에 몸을 맡겨둔다. 열심히 말해주는 에너지 넘치는 관광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있으니까. 


유쾌한 아저씨의 말 중 기억에 남는 대사.

"여기서 다시 만날 일은 없다. 그러니 버스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좋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니 지금 사랑을 하자!"


그녀가 감정의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애나와 훈은 공사 중인 놀이공원에 들어가서 단둘이 범퍼카를 탄다. 

수많은 여자들을 접대해본 훈은 무언가 삼키고, 참고, 억누르는 애나가 보였던 것 같다.

그게 아니어도, 쾅쾅 부딪치는 범퍼카가 전해주는 충격이 그녀가 굳게 걸었던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다. 


컴컴한 범퍼카를 타다 말고, 그들은 헤어지거나 혹은 싸워 관계가 멀어진 연인의 재회 광격을 지켜보게 된다. 눈치빠르고 센스있는 훈은 그들의 몸짓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다. 남자를 찾아 시애틀까지 날아온 여자는 함께 그리스로 돌아가자고 애원한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새로운 터전을 찾았다며 그녀를 매몰차게 몰아낸다. 그녀가 정말 그리스에서 왔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정확하게 진실을 말해줄 때가 있다. 애나와 훈이 목격한 그 연인의 모습이 그렇다. 훈이 홀로 1인 2역 상황극에 몰입하는데, 그 순간 애나도 함께 한다.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는 "제발"

남편을 죽여 감옥을 가야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변해버린 인생을 탓하며 소리없이 외치지 않았을까.

제.발.

제.발.


그녀가 눈앞의 연인에 빗대 감정을 표출하기까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이끌고, 기다려온 훈은 겉으로는 상남자여도 속은 따뜻하고 자상했다.



애나가 자신이 현재 감옥에 있고, 다시 돌아가야 하며, 대체 감옥에는 어쩌다 가게 됐는지 말할 수 있었던 건 범퍼카와 범퍼카에서 마주한 연인, 연인에 빗대 상황극을 한 훈 덕분이다. 격정적으로 급변하진 않았지만 잔잔한 파고를 읽을 수 있는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다.


애나는 하오를 '나빠요'로 알고 있는 훈에게 중국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훈은 애나의 말이 끝날 때마다 '하오'와 '화이'를 번갈아가며 맞장구를 친다. 아는 중국어라고는 '하오'뿐이었다는 훈이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리 없다.


그러나 이해하기 위해 노력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녀의 목소리, 말투, 눈빛,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도 이해되어지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훈은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그녀를 읽는다. (라고는 쓰나, 사실 나는 훈의 저 눈빛이 너무 좋다고 말하고 싶다.)


훈은 정말 커뮤니케이션의 귀재인가.

너무 집착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거리를 두지도 않고

적정한 거리와 적정한 속도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그녀 또한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들다니!


그러나 훈은 아직 할일이 있다.

그래서 더디게 마음을 연 애나를 두고 어쩔 수 없이 전화 걸려운 상대를 만나러 간다. 예상하듯 애나는 기다리라는 훈의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물론 애나 엄마의 장례식에 훈이 찾아옴으로써 둘은 다시 만난다.

그러다 훈은 그녀와 함께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녀 오빠 친구를 보게 되고, 결국 작은 트집이 몸싸움으로 커진다. 


72시간은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도 충분하나, 사랑을 나누고 이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녀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훈은 버스를 태워 그녀를 배웅한다. 헤어지기 전에 둘의 매개물 같던 시계를 다시 그녀에게 맡긴다. 훈은 끝까지 솔직하다. 헤어지는 듯 싶더니 그녀를 따라 차에 오른다. 물러서거나 돌아서지 않는다. 그때 애나는 엷게 웃었다.



안개가 자욱한 휴게소.

훈과 애나는 서로의 마음을 뜨겁게 확인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녀가 퇴소하는 날 휴게소 앞 카페에서.

헤어지기 직전 키스신은 너무 애절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훈은 자신의 손님이었던 한국인 여성의 죽음에 살인자로 얽혀 애나가 돌아가는 마지막 길은 배웅하지 못한다. 



다시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퇴소한 그녀가 제일 먼저 온 곳은 역시나 만나기로 했던 휴게소 앞 카페.

애나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오랜만이네요."


그일까? 그가 정말 왔을까.

그때 그는 당장 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죽음에 연루됐고 아마도 진실을 밝혀내는데는 실패했을 테니까.

하지만 시애틀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것처럼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라고 나 또한 숱하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의 무엇이 좋냐는 질문도.

그러나 그가 이래서도 좋고, 저래서도 좋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이렇기 때문에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훈이 왜 애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사랑이 두려워진 애나가 어떻게 다시 훈을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은 명쾌할 수 없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훈은 재촉하지 않았고, 기다릴 줄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그래서 환경도, 언어도 달랐던 둘이 서로에게 빠져들 수 있었다. 위태롭고 불안한 72시간 속에서도.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72시간이 빠르게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아까워하면서 보기는 또 처음이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탕웨이의 연기와 심장에 콕 박힐 것처럼 그윽하게 바라보는 현빈의 눈빛이 너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