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는 영화다

[50/50] 당신은 지금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50/50>에 관한 뒤늦은 감상평


오늘은 더 늦기 전에 <50/50>에 관해 정리를 해두려고 한다. 10여 일 전에 영화를 보고 나자마자 정리를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까지 오게 됐다. 그러는 동안 당시 느꼈던 벅찬 감동과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다. 기억이라는 건 이중적인 면모를 갖고 있어, 잊고 싶은 순간은 선명하게 오래도록 각인시키면서도 정작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금세 휘발시켜 버리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둬야지.

사실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두 '인물' 때문이었다. '500일의 썸머'를 보고 매력에 푹 빠졌던 조셉 고든 레빗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게 첫번째 이유,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고 극찬하던 사람이 '이동진' 기자였다는 게 두번째 이유다. 그렇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인물'이 티켓팅의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이후에는 조셉 고든 레빗이라는 매력적인 '인물'보다 '음악'이 더 크게 마음을 움직였다는 걸 깨달았다. 오죽했으면 끝나자마자 OST를 사야겠다고 결심했을까. 물론 한국에서는 OST가 발매되지 않았다고 하여 경제적 빈곤을 조금이나마 덜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참 많이. 영화를 슬프지 않게, 잔잔하게 그려내는 데는 '음악'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가령 슬픈 순간에 되레 시끄럽고 빠른 음악이 나온다든가 조용하고 외로운 순간에 음악이 흘러나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외로울 수 있을 만한 공간과 여백을 음악이 채운다.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한 셈이다.  

총평을 하자면, 참 정직하게 웃음과 감동을 주는 영화다. 합성조미료를 넣지 않아 다소 밋밋하지만 정갈한 엄마손맛 밥상처럼. <50/50>은 깔끔하고 간결한 맛이 살아있는 영화다. <50/50>을 아주 단순화해 요약하면, 희귀성 척추암 진단을 받은 27살 아담 러너(조셉 고든 레빗 역)가 그의 절친 카일과 함께 암을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명료한 줄거리로는 진짜 영화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영화 <50/50>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에 유쾌하게 반기를 든다. 그간 봐왔던 각종 드라마와 영화 등 영상매체가 숱하게 적용해왔던 고정적인 틀에서, 클리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병'과 마주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례로 <국화꽃 편지>를 떠올려보자. 암에 걸린 여성은 먼저 자신의 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춘다. 그리고 자기부정을 한다. 멀리 같 것 없이 지난해 말 종영한 <천일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암은 아니었으나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 주인공(수애 역)은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독하리만치 괴롭힌다. 두 예가 아니어도 드라마와 영화에서 서술하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병원 진단을 받고 충격받은 주인공은 그 순간부터 현실 감각과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감정의 나락에 빠진다. 물론 주변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한다.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건강이 더욱 악화되고 난 한참 뒤에야 측근의 사람들이 알고 오열한다. 'time of death'가 당장 내일이 아닌데도 코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음울하게 그늘진 분위기는 주인공을 더욱 안쓰럽고 측은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스토리 전개를 폄훼하자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천일의 약속>이 종영할 때까지 월화 밤 10시면 TV 브라운관 앞을 지켰고, 혹시 밤 10시 본방을 사수하지 못한 날이면 뒤늦게 다운받은 드라마를 보면서 베갯잎이 흥건하게 젖도록 엉엉 울 정도로 폐인 아닌 폐인이었으니.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며 간접적으로 마주하고 경험하는 삶의 방식이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수렴되는 것도, 될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50/50> 참으로 '의외성'이 짙은 영화다. 주인공 아담 러너는 척추암 진단을 너무나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이성적으로 삶을 직시하는 태도는 물론 주인공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내내 새로웠다. 놀라지도, 화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아담의 모습이 말이다. 최소한 "하느님은 어찌하여 내게 이런 말도 안되는 시련을 주시는 것인가"는 류의 감정토로라도 있어야하는 데 말이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냉정'일 것이고 '냉정'을 대체하면 '평정' 정도 되지 않을까. 만약 내가 이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과연 아담처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러다 쉽게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 같단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상상이 현실인 가정이 있을 텐데, 뭐 그런 등등의 이유로.

중요한 건 '암'이란 극단적 요소가 아니어도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일 듯하다. 누가 자신의 '암'을 소재로 술집에서 여자를 꼬실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친구의 '암'을 가지고 "암이 영감을 주거든요."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어렵다고 여겼던 생각과 말들을 영화 속의 두 친구는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줘 관객으로하여금 자연스레 어려운 것이 실은 쉬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영화 타이틀이 <50 대 50>인 것도 그런 까닭일 게다. 슬픔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낙천성. 뻔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이 나는 단연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글의 제목 '어떻게 살고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다소 장황하지만 긴 대답이 될 수 있겠다. 이제 '지금 누구와'에 방점을 두고 나머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아담에게는 절친 카일이 있다. 아담의 미녀 여자친구가 아담 몰래 바람피고 있는 것을 알고 아담보다도 먼저 혹은 아담을 대신해 화내는 역할을 맡는 것도, 여자친구가 떠나고 아담이 병원 치료를 받으러갈 때마다 운전석을 지키고 있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친구 카일의 매력을 얘기하기란 부족한 감이 있다. 언뜻 보면 카일은 아담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아담이 이성적이라면 카일은 감정적이고, 아담이 냉정적이라면 카일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다. 소극적인 아담과 달리 카일은 호탕하고 적극적이다. 그래서 둘이 매치가 잘 안될 것 같이 보인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 아담의 증세가 악화되고 감정기복이 심해지자 둘은 대립한다. 아담은 싫다는데도 쇠약해져가는 자신을 데리고 술집가기를 보채는(?) 카일에게 기억하건대 처음으로 화를 낸다. 여기서 그쳤다면 둘도 결국 '그렇고 그런 사이'였으리라. 하지만 둘의 우정은 그처럼 헐겁지 않다. 카일과 다투고 쓸쓸하게 집에 왔던 아담이 늦은밤 카일의 집에서 발견한 무엇이 증명한다. 카일은 아담 몰래 '암을 이겨내는 법', '함께 극복하세요' 같은 류의 의학서적을 읽어오고 있었다. 중요하다 싶은 페이지 윗 모퉁이를 접어가면서 꽤나 꼼꼼하게. 또 다른 '의외성'은 여기서도 진면모를 발휘한다. 카일은 누구보다도 아담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우정과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웠고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나는 과연 카일 같은 친구였던 적이 있었나. 아니면 카일 같은 친구를 곁에 두고 살고 있다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질문에도 쉽게 답변하지 못했다. 단순한 영화는 이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보는 사람에게 생각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다. 카일 같은 친구가 되거나 카일 같은 친구를 곁에 두거나. 삶은 그래야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나부터 달리해야겠지.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어느 순간 친구과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가짐, 태도를  재정비해야할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돈키호테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로도 치환될 수 있겠다), 그 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주 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조용히 내면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글의 제목을 '당신은 지금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로 단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한 이동진 기자의 말을 빌려 끝맺음을 할까한다.
"사람은 두 부류가 있죠. 반쯤 물이 담긴 컵을 보고 '어,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하는 사람과 '에이, 반밖에 안남았네'라고 말하는 사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느 쪽의 사람이냐고, 아니 나는 어느 쪽의 사람이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