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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

[Her] 사랑해야 하는 건 내(I)가 아니라 그녀(Her)




[Her] 사랑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녀(Her)


정말 몹시도 기다려온 영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그녀(Her)'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으며, 2012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아무르'였던 것처럼 어쩌면 2014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그녀(Her)'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별점을 5개 만점을 주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물론 영화는 광고처럼 마냥 달달하거나 로맨틱하지 않다. 심지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이 아리고, 생각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대필 편지를 쓰는 작가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편지는 받는 사람은 물론, 사연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3자에게도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회사 인포 담당자는 테오도르의 열혈팬 중 하나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그만의 섬세한 감성을 살려 마음을 전할 누군가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했고,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아내와는 이혼 절차를 진행 중인 까닭이다.


그는 무료하고, 외롭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오늘에 불과한 나날이다. 퇴근하는 그의 발걸음에서 대필 편지를 쓸 때와 같은 활기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습관처럼 메일을 체크하고, 일정을 확인하는 게 퇴근길의 익숙하고도 지루한 모습이다.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 때는 여자의 벗은 몸을 볼 때 그뿐. 집에 돌아와서도 그가 소통하는 것은 게임 속 가상 캐릭터가 전부. 잿빛 도심만큼이나 그의 삶은 흑빛에 가깝다. 그러다, 그의 삶은 인공지능을 갖춘 OS '사만다'를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반신반의했던 OS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그 대화가 여태껏 그가 만나왔던 어느 여자보다도 훨씬 생동감이 있는 것. OS인 '사만다'와의 대화 덕분에 그의 무료한 일상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그는 '사만다'와의 대화가 너무도 즐겁다. 그래서 그도 모르게 점점 더 낙천적인 사만다의 성격에 매료되어 간다. 빠져든다.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진 사만다 덕분에 그는 사만다가 이끄는 대로 마치 게임을 하듯, 길거리를 걷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OS인 '사만다'도 그의 속사정을 잘 알기에 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에 둘은 감정적으로 통한다. 소개팅을 하는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알 수 없는 서운함과 묘한 질투심을 느끼고, 테오도르는 육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만다와 대화를 통해 섹스를 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몸과 마음 모두 둘은 아주 깊게 연결돼 있다.





그가 컴퓨터 혹은 이어폰에 대고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다. 감정을 읽을 줄 아는 OS'사만다'는 그만을 위한 음악을 선곡하고 때때로 직접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몸이 없으니 음악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고. 그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테오도르와 사만다, 우리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여자친구가 전지현보다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


몇 년 전, 이런 휴대폰 광고 카피가 있었다. (카피가 갖는 논란은 차치하고) 연애, 즉 사랑은 정신적 교류만큼이나 육체적 교류가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사랑하니까 더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고, 그래서 만지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스킨십 없이, 아니 형체 없이 사랑의 감정을 나누던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에 위기 아닌 위기가 찾아오는 것도 그래서 일면 당연하게 보인다.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버린 사만다가 자신을 대리하여 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어줄 여자를 찾아 일종의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제의에 크게 이의를 달지 않았지만, 막상 낯선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어 버린 것을 자각한다. 애매모호하고 난감한 관계는 이 일로 관계의 진전에 약간의 소강기를 갖게 되나 그들의 정신적, 감정적 교류는 여전히 지속된다. 


사만다는 이혼 서류에 싸인하기 위해 별거한 아내를 만나는 테오도르에게 괜히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들의 관계가 좀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끝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 끝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자기 진화처럼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낄수록 진화되어가는 사만다는 OS 업그레이드를 겪은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만다에게 사만다를 더욱 감정적으로 진화시켜 줄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어떤 철학자였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의 등장으로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점점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줄곧 노력하는 쪽은 사만다였다. 테오도르가 이어폰을 꽂고 사만다를 부르면 사만다는 언제든 달려와 그를 위해 말을 걸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감정에 집중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의 이야기에, 사만다의 감정에 집중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 사만다의 부재가 잦아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어땠냐"고 그가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사만다의 기분을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진화해버린 사만다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사만다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착각이었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조차 사만다에게는 또 다른 누군가'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해체 혹은 작별의 수순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예상하듯, 그녀는 떠난다. 





다시 홀로 남은 그, 그리고 그녀

 

 

OS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기계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래서 에이, 설마, 하면서도 완벽하게 부정하지는 못한다. 편지의 자리를 이메일이, 다시 이메일의 자리를 실시간 sns가 차지해버림으로써 모든 관계가 너무도 쉽고 간편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탓이다. 스마트폰과 대화하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웃고 있는 우리의 현재가 저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영화를 마냥 로맨틱하게만 보기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사랑 영화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면서 유독 눈과 귀에 들어왔던 단어와 문장들이 있다. 우선 scanning, share, pretend, real, relationship이란 단어다. 대필 작가인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자신을 '스캐닝(scanning)'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얼핏 들으면 이 말은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처럼 생각되나, 실상 '스캐닝'이라는 것은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마치 관조하듯 멀찍이 지켜보기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타인의 삶에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그녀'에게도 큰 관심이 없다. 오직 관심은 그 자신(I)에게 집중돼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가 그의 바람과 기대에 부응하고 맞춰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위해 만난 아내가 "당신은 당신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여자를 바라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스캐닝(scanning)만 하는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pretend)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을 나누어야 한다(share)'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자기 감정에 빠져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걷어내고 진정 그녀를 바라볼 때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I나 He가 아니라 Her인 것도, 사랑을 하는 데 있어 나보다 '그녀'를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디에 방점을, 누구에게 포커스를 두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사랑해야 하는 건 사랑에 빠진 내(I)가 아니라 그녀(Her)여야 한다고. '상대방'이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 3D 영화를 볼때 안경을 나눠주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입장할 때,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어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그와 나, 단둘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 완전히 몰입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소음으로부터 단절되어. 


* 영화의 OST가 정말 좋다.


* 한 번 더 본다면 또 다른 디테일한 감정들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