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두고 꼭꼭 씹어 소화해야 하고,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책이 있다. 내게 <밤이 선생이다>는 그런 책 중 하나다. 수많은 매체가 올해의 추천도서로 선정했다는 문구에, 그리고 뒤돌아 앉아 있는 남자를 그린 표지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과거도 착취당한다'는 제목으로 실린 글을 읽자마자 그 마음은 이내 소리 없이 무거워졌다. 결코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될 글이기 때문이다. 1월에 사서는 다 읽기까지 5개월이 걸린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먼저 읽고, 읽고 난 다음에는 필사하기 시작했다. 한문장도 허투루 읽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산문집을 낸 작가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글에는 저자인 황현산 교수의 시선이 담겨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말이다. 저자는 효율성을 내세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인문학이 홀대받는 시대와 '빨리빨리'로 귀결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생겨난 수많은 병폐들을 안타깝게 담아낸다. 또, 젊은 세대가 역사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섭게 변모한 사회구조,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평등하지 못한 사람들을 언급한다. 경제적 성과를 이룬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저자가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그렇게 의식은 착취당하고, 착취로 생기는 사회의 불평등을 이미 앞선 세대로서 잘 알고 있어서 일 테다.
우리는 토건주의, 개발주의 하에 전국적으로 진행된 각종 건설 사업으로 반듯한 구획과 화려한 고층 빌딩을 얻었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그 자리에 시간과 세월이 켜켜이 쌓여온 '삶'이 자리를 잃었음을 주장한다. "당시에 현대 예술을 창도했던 보들레르 같은 사람은 이 새로 정비된 도시에서 삶의 폐허를 보았다. 그는 삶이 살고, 삶이 꿈꾸고, 삶이 고통을 견디던 그 어둡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中, p50-51)
우리가 자유와 평등처럼 잊지 말아야 하지만 실체가 없고 추상적이기에, 그 가치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점점 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성과와 효율성이 인간의 가치가 서야 할 자리를 차지해버림으로써 야기된 숱한 사회구조적 문제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가장 최근 발생한 미우라 리조트 사건, 세월호 참사, 서울 지하철 사고 등만 보아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프게 병들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라는 저자의 말이 뇌리 깊숙이 박혀 잊혀지지가 않는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
* 과거도 착취당한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소금과 죽음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 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작 비극은 그 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멜랑콜리아) 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의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
인간이 수수 천년 사용해온 말 속에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들어 있다. 제가 쓰는 말을 통해, 그 길고 깊은 어둠 속에서 그친 적이 없이 빛났던, 그리고 지금도 빛나는 작은 불빛들을 저 광채의 세계와 연결하려는, 또한 그 세계가 드문드문이라도 한 뼘씩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던 시인에게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이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용기는 당신이 한순간이라도 꿈꾸었던 세계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용기이다. 어떤 파락호라도 그 용기를 욕되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정치가 근대화를 지향할 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모든 삶을 환하게 들여다보면서 백성들을 빈틈없이 다스리려는 의도가 있다.
당시에 현대 예술을 창도했던 보들레르 같은 사람이 이 새로 정비된 도시에서 삶의 폐허를 보았다. 그는 "삶이 살고, 삶이 꿈꾸고, 삶이 고통을 견디던" 그 어둡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밝고 깨끗하고 번쩍거리는 폐허에서는 어떤 감동스러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현대 예술을 이 도시라는 이름의 폐허에서 사라진 기억을 복원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개천이 긴 어항으로 바뀌었을 때, 거기 등을 붙였던 중소 상인의 삶도, 한국 예술에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 넣던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터전도 함께 사라졌다.
* 두 국사 선생
한 무리의 중학생과 인솔 교사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도공들이 뼈저린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비록 노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룩한 작업의 가치를 그 생산제도의 성격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도공들이 그 아름다운 그릇들을 억압과 고통 속에서, 원한과 분노 속에서만 만들었지만, 도공들은 또한 그 도자기를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해 그 나름의 개념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없었다면 도공들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끌어왔겠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닐 것인가. 교사는 도공들의 편에 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도공들을 모욕한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 찌푸린 얼굴들
"가끔은 무자극적인 사고를 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 지지부진하게 힘을 소비하는 일은 많아도 자신을 풀어놓는 데는 늘 실패하는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는 일에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내가 자극 없는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혐오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겁내고 힘겨워한다고 말하는 편이 아마 옳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시간이 내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늘 옛날의 기억 속에만 있다.
* 당신의 사소한 사정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의 쓰고 있는 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된다.
마음 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에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질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 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 사투리의 정서
토속의 언어는 사람살이의 깊은 속내를 터득하도록 도와주고, 감정의 밑바닥을 자극하여 새로운 영감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토속어와 방언에는 감정과 생각의 어떤 극한이 있다. 혈연과 지연에서 비롯한 원시적 정서의 탄력을 받고 불쑥 튀어나온 한마디 말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한다. 사투리의 장점이 여기 있지만 위험도 역시 그 자리에 있다. 같은 언어 정서를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부담 없었던 말이 다른 사람들을 아연하게 만드는 경우는 허다하다. 사투리로 표현할 때는 제법 훌륭하고 탄탄했던 생각을 표준어로 바꿔놓고 보면 여기저기 허점이 드러나는 수도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인이라면 사석에서라도 표준어를 써야 할 이유가 이와 같다. 표준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말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의 특수한 정서와 얽혀 있는 생각을 보다 큰 틀의 잣대로 검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
정성스럽게 음식을 느끼려는 자에게 맛은 도처에 있다. 게다가 이것은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김명인이 쓴 <우주선>이라는 시가 있다. 그 우주선은 사실 차고를 개조해 만든 방인데, 창이 없어 "막 궤도에 진입한 우주선의 선실처럼" 대낮에도 불을 켜놓아야 한다. 승무원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노인 두 사람이다. 두 노인은 거동이 불편해 우주선의 승무원이 유영하듯 걷는다. 그들의 혈육들은 저 멀리 지구에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 머리에 가득 서릴 얹은/ 허름한 사내가 고등학생 돼 보일 남자앨 앞에서워/ 우주선 앞에 서 있다/ 한 손엔 애기 머리통보다 조금 더 큰 수박 덩이/ 남은 한 손엔 무언가 담은 검은 비닐봉지 하나,/ 빈손의 애비보다/ 양손을 노인들에게 하나씩 빼앗긴 아이가/ 오히려 몸 둘 곳이 없다/ 식구가 함께 건너지 못하는 캄캄한 하늘江이/ 저들 사이에도 흐른다는 것일까."
저 이상한 우주선 안에도 사람이 있고, 사람의 정이 있고, 사람의 슬픔이 있다. 비인간화의 문명, 그것은 참 오래전부터 들어온 이야기다. 그런데 그 비인간이 바로 나이고 우리들이다. 이런 시를 읽을 때 잠시 사람으로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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