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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30

 

기분 전환 겸 방안에 향수를 두 번 뿌렸다.

외출할 때(연애할 때) 아니면 잘 뿌리지 않는 편인데

얼마 전 회사 동료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야근하다 말고 칙칙- 향수를 뿌리던 파트장은

며칠 내내 야근하는 자기 자신이 불쌍해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며,

가방에서 향수를 꺼내더니 자신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도 몇 번씩 뿌려주었다.

 

그 순간,

그 별것 아닌 향기는 별스럽게도 우리를 꽤 오래 달콤하게 달래주었다.

 

그 뒤부터,

나도 아주 가끔- 오늘처럼 밤새워 일을 해야 할때 집에서 향수를 뿌리게 됐다.

 

오늘 방 공기를 산뜻하게 만들어준 지미추 오뜨뚜왈렛은,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오던 때 산 건데

뿌릴 때마다

그 향수를 살까 말까 한참 고민했던 2013년 7월의 내가 생각난다.

 

 

-

 

 

마드리드에서 두바이를 거쳐 인천으로 돌아오는 귀국길,

두바이 공항 면세점에서 가족 선물을 골랐다.

20일 넘게 홀로 스페인 집시처럼 걱정없이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준,

아니 이번에도 기꺼이 나를 포기해준 동생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일종의 성의 표시.

 

동생이 원래 써오던 향수가 없길래

평소 향이 좋다고 생각했던 지미추 오뜨뚜왈렛을 사기로 결정하는데는 1분도 안걸렸다.

나를 우유부단하게 만든 건 향수 용량.

60ml를 사야할까,

100ml를 사야할까,

별 것 아닌 용량 앞에서 걱정한 건 동생의 취향 때문이 아니고

향수를 사고난 뒤 내 통장 잔고였다.

우습게도-

 

나는 통장 잔고를 걱정했다.

 

이왕 사는 거 100ml로 살까.

아니야, 100ml로 샀는데 안좋아하면 어떡해- 그럼 너무 돈이 아깝잖아

 

그럼 그냥 60ml로 사자.

근데 60ml는 너무 작지 않아?

 

그렇게 향수 앞을 한참 서성였던 나는 60ml를 샀다.

 

그런데 정작 동생은 지미추 향을 안 좋아해

지금 이렇게 내가 쓰고 있다.

그러니 사실, 60ml를 산건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한 이유는

 

 

-

 

 

내가 고작 몇 만원 차이도 안나는 향수 앞에서

시원스레 결제를 못해서다.

선뜻 100m를 사지 못한 언니였기 때문이다.

 

애타게 기다렸던 스페인을 가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바르셀로나 가우디 건축물도 눈앞에서 구경했지만

 

바르셀로나 후미진 골목길에 자리잡은 레스토랑 길가 메뉴판에 적힌 유로를 한국돈으로 환산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잔고를 걱정하고

 

세상에, 돈은 왜 이리도 쉽게 사라지는 걸까-

다시 놀라고

 

열심히 잘 놀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사 휴가로 스페인을 왔었던-그라나다 숙소에서 만난 남자들을 마냥 부러워했던 게 바로 나였다.

 

이 정도의 물질적 풍요로움은 즐길 자격이 있다면서도

여전히 분수에 맞지 않는 듯 보였던 김애란 소설 '큐티클' 주인공처럼

해외여행 간다면서도 정작 캐리어 하나가 없어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친구 집을 찾아갔던 소설 속 스물여덟의 여자마냥

 

그랬다.

 

나는 왜 이렇게 모나고,

자존감은 낮으면서 자존심만 센 것인지

 

행복하다고 외치면서도

순간순간 행복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려는 모난 모습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땐 그랬다.

스물아홉은 호사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불안했다.

행복하면서도, 행복하면 안되는 것 같아, 행복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초조했다.

 

스페인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동생들이 내게 '서른 즈음에'를 불러주며 애처롭게 혹은 불쌍히 봤지만

나는 29에서 30으로

앞자리가 바뀌는 날, 특별히 슬프지도 특별히 기쁘지도 않았다.

 

내게는 28에서 29가 되던 날처럼

다시 찾아온 새해였을 뿐이다.

 

점점 무뎌지는 걸까?

감정이 사라지는 걸까?

 

오히려

29에서 30이 되니

늘 반쯤 뜬 상태로 지냈던 20대보다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이다.

한없이 가벼워 공중으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풍선 끝에 무게추를 달아둔 느낌.

그 무게감이, 좋다.

 

물론,

밤새워 놀고도 거뜬 없었던 20대의 체력이

늘 지치지 않았던 20대의 뜨거움이

간절했던 20대의 열망이

그립긴 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시작하는 30대의 설렘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30대의 책임감이

그 묵직한 무게감이 좋다.

 

스물아홉의 해가 저물고

서른이 시작되는 지금,

 

그래서

다만 바라는 건

회사를 그만두고 150만원 항공권을 지르는 대신

60ml 말고 100ml를 자신있게 살 수 있는 언니가 되길,

그렇게

 

그래서 잘했다는 사람 하나 없이 떠나,

즐겁기보다는 무거웠던 기분은

바르셀로나를 가기 위해 잠시 들렀던 두바이 공항이 마지막이길

 

 

 

잘했다는 사람 하나 없이,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내 스페인 여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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